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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Aug 09. 2021

해발 4300미터에서 이성을 잃게 되는 법

콜로라도 Pikes Peak

파이크스 피크는 언제 가나


2015년부터 남편이 가자고 했던 파이크스 피크. 올여름에는 꼭 가자고 한 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이상하게 그곳은 늘 뒤로 미뤄졌다.


그러다 어젯밤 둘 다 거기 언제 가냐고 말이 나와서 내일 가지 뭐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 가려고 알람을 맞췄다가 껐다 맞췄다 하다 보니 오전 11시.


남편이 만들어 놓은 파스타 먹으면서 파이크스 피크는 언제 가냐며 둘 다 피식 웃었다. “밥 먹고 그냥 가자.” 내 말에 남편도 바로 그러자고 한다.

8월초 낮기온 약 12도 파이크스 피크 가는 길

진 빠지는 외출 준비


아이들 외출 준비는 언제나 어렵다. 특히 꽃은 거의 매번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준비해서 부릉부릉 가자.” “노 부릉부릉 노” 옷도 못 벗기게 요리조리 도망을 다니니 일단 사자부터 공략하기로 한다.


사자는 미국에서 Terrible two라고 불리는 세 살이지만 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자는 그저 티셔츠를 자기 마음대로 골라야 한다. 계속 그린이라길래 그동안 애정 하던 트랙터 티셔츠를 말하는 줄 알았더니 메사 베르데 국립공원 기념 티셔츠를 입겠단다. 그리고 바지는 꼭 고추 그림이 있는 반바지여야 한다.


사자는 벌써부터  신발 신자고 노래를 하는데 꽃은 아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치카치카 하자.” “노 치카치카 노” 몇 번 반복 끝에 결국 아기처럼 꽃을 안아 욕실 세면대에 올려줬더니 막상 혼자서 잘한다. “음 패! 뱉자.” “노 패 노.” 


왜 모든 것이 노여야 하는지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예스해 보라고 시키는데 예스는 전혀 다른 소리가 되어 나온다. 그래서 노만 하는 걸까?


꽃도 옷은 자기가 고르려고 한다. 꽃의 동의를 85% 확률로 받을 수 있는 건 프린세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옷이다. 꼭 드레스가 아니어도 주름 장식이 있거나 발레리나가 있으면 오케이. 그다음엔 기저귀 노, 바지 노가 이어지다 핑크색 바지로 낙찰되었다.


애들은 어렵다


이미 진은 많이 빠졌지만 차에 탔다. 그런데 이런, 내비게이션 설정하다 보니 두 시간인 줄 알았던 거리가 세 시간? 왕복 플러스 두 시간. 벌써 두 시 다 되어 가지만 이왕 준비한 거 포기할 수도 없어서 Just go!


꽃은 바깥 구경을 하며 잘 있었고 사자는 잠이 들었다. 원래 그 나이엔 두 시간 낮잠 자는 게 정상이지만 신생아 때부터 잠이 없던 사자. 오늘은 운이 좋은가 싶었더니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깬다. 깨서 칭얼거린다. 그러면서 자기 손을 꼭 잡으란다. 난 조수석인데? 불편하게 손을 잡고 있다가 빼면 또 난리를 친다.


그리고 꽃은 갑자기 배가 아프단다. 기저귀에 응가하라고 해도 아니란다. 투정이려니 하고 모른 척하고 싶은데 닭똥 같은 눈물이? 닥터한테 가자니 “노 닥터 노”라며 눈물이 한 방울 더 떨어졌다.


아이 둘 다 그러니 안전벨트를 빼고 재빨리 뒤로 가서 두 카시트 사이에 앉았다. 한쪽 손으로 꽃의 배를 문질러주고 다른 한쪽으로는 사자의 손을 잡고 있는데도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고속도로 운전하면서 그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남편도 뿔이 난 게 보인다. 아.. 애들 너무 어렵다.


이런데 오면 굳이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도착해 산길로 들어섰는데도 50분 정도 더 가야 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섰다. 좁은 산길로 유명한 곳이라 예상은 했지만 사자가 거의 바로 우엑거린다.


그동안 경험이 있어서 바로 창문을 열어주니 나아졌다. 그런데 우리 앞에 느리게 가는 트럭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매연을 내뿜는다. 안 그래도 콜로라도 전체에 산불 연기가 퍼진 상태라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창문을 닫았더니 사자가 결국 토를 했다. 병원에서 별 이상 없다는데 사자는 차만 타면 이렇다.


때마침 큰 뿔 야생 양이 무리 지어 내려온 곳에 공간이 있어서 차를 세우고 사자 옷을 갈아 입혔다. “Better?” 물어보니 베럴이라며 식 웃는다. 차에서 내린 후로는 발을 땅에 닿지 않으려고 안고만 있으란다.


꽃은 야생 양 같은 건 보지도 않고 연신 푸푸 응가라고 외쳤다. 트렁크를 열고 변기통을 내어주니 앉아서 문을 닫으라고 하는 꽃. 거기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계속 more이란다. 하긴 화장실 뷰가 파이크스 피크면 모얼 할 만도 하지?


꽃은 소변만 보고 응가도 안 하면서 계속 모얼이라며 바지도 못 입히게 했다. 아직 배변 훈련이 되지 않은 꽃은 이런데 나오면 굳이 변기통에 배변을 하려고 한다. 집에서 하라고 할 때나 좀 하지 굳이 어디 나갈 때만. 그래도 그 덕분에 꽃의 배는 싹 나은 것 같았다.


꽃의 화장실 뷰


해발 4300미터에서 이성을 잃게 되는 법


파이크스 피크 꼭대기 주차장은 지금 공사 중이다. 그래서 원래 인당 $15인 입장료가 $12이란다. 간식을 먹고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두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몰려왔다. 나에게는 경험치가 있으니까 하하.


꽃과 사자가 내려서 잠바를 입자마자 파이크스 피크 기차가 들어왔다. 해발 4300미터에서 운행하는 기차인데 새빨간 색이 황량한 꼭대기에 잘 어울린다.


같은 기차를 봐도 한 명은 이리 가고 다른 한 명은 저리 가니 남편과 떨어져서 보고 있는데 플랫폼을 돌아 기차 반대편으로 먼저 간 꽃이 타지 말라고 한 기차에 올라타다가 발이 빠질 뻔했다.


꽃은 말 안 들을 때 몸을 오징어 만들기에 달인이다. 사자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고 빈도도 훨씬 높다.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오징어 몸으로 하겠다고 용을 쓰면 일단 심리적으로 KO패.


그럴 때 0을 기준으로 상심 지수는 -30을 깔고 인내심 한계 지수는 +30에서 시작하게 된다. 내려가고 올라가는 두 수치가 정점에 달하면 나도 모르게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먼 길을 왔으니 화장실은 가야겠기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많아서 긴장부터 되었다. 평소 잘만 오르내리는 계단에서 꽃은 주저앉고 사자는 정말 천천히 이것저것 다 만져보며 내려가려고 했다.


안 될 것 같아 꽃을 안고 내려가는데 자꾸 빠져나가려고 한다. 사람이 많고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으니 엄마가 안고 가겠다고 말하고 내가 힘줘서 안고 있었다.


패밀리 화장실이 비어서 뒤돌아 남편을 찾으니 안 보인다. 이럴 땐 사자를 조금 밀어붙여서라도 빨리 데려왔으면 좋겠는데 답답함이 확 올라온다. 먼저 문을 닫았다.


꽃은 손도 안 씻겠다고 하고 체인징 테이블을 만지며 벽에 붙어 서있다. 내가 딱 볼일을 보는 사이에 화장실 앞에 도착한 남편은 우리가 안에 있는 줄 알고 눈치 없이 부른다. 아빠 목소리를 들은 꽃이 화장실 문을 열겠다고 달려갔다.


그 순간 폭발은 일어났다. 볼일을 보다 말고 뛰어가 꽃의 손을 홱 낚아채서 있던 곳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니 꽃은 더 징징거렸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문을 열어 남편이 들어왔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남편은 왜 눈치껏 기다리지 못했는지, 사자는 왜 그렇게 말을 듣지 않았는지, 꽃은 왜 공공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한 건지 애초에 우리의 외출은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건지 분통이 터져서 혼자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데도 사자는 그 무거운 문을 어떻게 해보려다 얼굴이 거의 부딪힐 뻔하는 게 또 화가 났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애 보느라 피곤했던 남편도 열이 받았는지 꽃을 둘러업고 차로 걸어갔다.


말없이 아이들 안전벨트 채우고 있는데 옆으로 지나가는 가족이 눈에 뜨인다. 누나와 형은 아빠를 따라가고 사자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아기 동생은 품에 안겨 있다. 우리도 첫째가 다운증후군이 아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괜한 생각이 스친다.


그때 꽃이 미안해 라고 했다. 꽃 때문에 힘들어서 화내고 나면 내가 그 소리를 해서인지 우리가 속상한 걸 알 때 꽃은 미안하다고 한다. 어, 오늘은 좀 미안해라 딸.


집 오는 길에 느낀 점. 한국 식당에서 음식을 사서 차에서 저녁을 먹었다. 불편하게 먹는데도 아이들이 오징어 몸 만들지 않고 잘 받아먹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뭘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 행동이 관건이다.


세 시간 차 타고 오면서 같이 노래도 부르고 집에 와서 꿀잠에 든 꽃과 사자. 파이크스 피크 여행은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파이크스 피크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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