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로서의 불안과 성실이 남긴 성장의 뿌리
후배라는 자리는 언제나 조금 낮았다.
앉으라고 하면 앉았고, 서 있으라 하면 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끝은 자연스레 짧아졌고, 웃음은 반 박자 늦게 나왔다. 그 자리는 늘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공장에 처음 ‘후배’로 투입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먼저 배웠다. 먼저 말하지 않는 법, 필요 이상으로 묻지 않는 법, 모른다는 표정을 들키지 않는 법. 후배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보다 눈치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현장 공사감독관으로 일하던 시절의 기억이다. 여름 우기철의 도로는 언제나 폭탄을 품은 것처럼 위태로웠다. 안전조치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제였다. 현장 인근 식당에서 저녁 식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김국부 선배는 내 손에서 숟가락을 가로채듯 뺏으며 짧게 내뱉었다.
“비 쏟아지기 전에 현장부터 훑고 와.”
폭우가 예보되어 있으니 불안전한 곳이 없는지 다시 점검하라는 명령이었다. 작업자들과 현장으로 향하면서도 속에서는 뜨거운 불만이 치밀었다. 밥 한 술 뜰 시간조차 주지 않는 선배의 무심함이 야속했다. 빗줄기가 시작된 현장에서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에 젖어 들며, 우리는 늦도록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날 늦은 밤, 적막을 깨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진례 삼거리 부근에서 화물 트럭 한 대가 전복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화물 차량이 논두렁에 고꾸라져 있었고, 구조 작업이 긴박하게 이어졌다. 나는 선배와 함께 우리 공사 구간으로 달려갔다. 빗속에서 확인한 방어 울타리와 위험 표지판은 우리가 두고 온 모습 그대로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선배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도감이 섞인 긴 한숨이 빗줄기 사이로 흩어졌다. 만약 그때 선배의 채근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그 자리를 비워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아찔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선배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행동으로 길을 냈다.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진흙탕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고, 소동이 잦아들면 아무 말 없이 연장을 챙겨 자리를 정리했다. 그 뒷모습은 가르침이라기보다 차라리 단단한 ‘기준’에 가까웠다. 김 선배가 그날의 사고를 예지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떤 직관이 그를 움직였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그 질문은 세월의 뒤안길에 묻어두기로 했다.
나의 하루는 늘 누군가의 등을 보며 흘러간다. 물어보면 귀찮아할까 봐, 혹은 나의 무지를 들킬까 봐 질문을 삼키고 앞선 이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려 애썼다. 칭찬은 인색했고 지적은 서슬 퍼랬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했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기보다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하루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후배라는 자리는 낮아서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 비어 있어서 불안했던 자리였다는 것을. 그 빈칸을 채우는 것은 화려한 요령이나 말솜씨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성실한 태도였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결코 완벽한 후배가 아니었다. 서툴렀고, 느렸으며, 때로는 비겁해지고 싶을 만큼 겁도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 시절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삼켰던 질문들을 밤마다 일기장에 펼쳐 보았고, 이해되지 않던 선배의 단호함을 다음 날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며 나를 갈고 닦았다.
후배라는 이름으로 견뎠던 그 낮고 좁은 자리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었음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