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物情
생애 첫 사회생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초등학교 입학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경직된 분위기와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이라는 명칭의 낯선 이들의 생성은 나에게 매우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이었다. 혼자 조용히 의무적으로 다니던 학교는 나에게 몇몇의 친구를 선물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와 같은 순수함이 가득했던 시절, 하교 후 남는 시간이 많았기에 친구네 집에 놀러가기도 하고 우리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기도 하였다.
하루는 외동딸이었던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친구의 방에서 컬러 클레이로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친구의 어머니께서 저녁 식사를 차려주셨다. 친구 어머니, 친구, 나 이렇게 셋이서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서 메인 반찬은 고등어였다. 생선을 잘 먹는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생선을 잘 먹지 않았고 친구 어머니는 생선을 먹이기 위해 나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셨다. 친구는 이렇게 잘 먹는데 너는 왜 먹지 않냐고 너도 친구처럼 잘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자 욱한 친구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얘네 집은 되게 코딱지만하고 반찬도 김치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저 집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 먹고 왔으니까 얘도 밥 주지마.” 아마 내가 생선을 잘 먹는 이유를 우리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이것저것 잘 먹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반찬이 부실했던 건 사실이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스스로 외식을 할 수 있는 성인이 된 나는 지금도 초밥과 생선을 좋아한다. 친구 어머니는 매우 당황하셨고 “친구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라며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친구는 더 심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 얘네 집은 베란다도 없고 집에 바퀴벌레도 있단 말이야.” 밥 먹다가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의 어린이였다. 친구 어머니도 많이 당황해하시면서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울지 않으려 애썼다. 빨리 집에 가고 싶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집에 간다고 이야기해야 무례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머리를 굴리느라 애썼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파트와 일반주택의 반지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이름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 친구의 집은 아파트였고 평소에 베란다라는 이야기를 자주했는데 그 알 수 없는 장소는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나이였다.
그날 이후 나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것은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기보다는 친구네 집에 가서 놀거나 학교 운동장 또는 놀이터를 선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다른 친구의 집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과정을 귀찮아 하기때문에 본인의 집에서 종이 인형 놀이를 하거나 비디오를 같이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을 선호했고 나는 왔다 갔다 하는 이동의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지만 망신을 피하기 위해 탐색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가정환경이 나와 비슷해보이는 친구는 우리 집에 데려와서 놀면서 그 친구와는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집에 자주 왕래를 하였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친구와 그날의 저녁 식사 상황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일이 나에게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