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의 사물 네 번째, 흰 컵
별일 없는 보통날, 아침에 일어나 물이든 우유든 한 잔의 마실 것이 필요할 때 찬장을 열면 크기도 무늬도 재질도 제각각인 컵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고민 없이 손이 가는 것은 특별할 것 없이 얌전하게 놓여 있는 흰 컵이다. 딱 손바닥 크기만 한 높이에, 손가락이 부드럽게 통과되는 넉넉한 둥근 손잡이, 안정감 있게 책상과 밀착되어 그림자를 드리우는 아주 보통의 흰 컵은 멈춰 있던 일상의 장면에 사뿐히 파동을 일으킨다. 그 순간부터 보통날의 일상은 제 속도로 흘러간다.
흰 컵은 투명한 컵과는 다르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제멋대로 난반사시키지도 않고, 방 안의 풍경과 사물을 적나라하게 비추지 않는다. 그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며 깨끗한 빛깔로 조용히 풍경 안에 녹아든다. 흰 책상, 어두운 나무 테이블, 검은 테이블 그 어떤 자리 위에 놓여도 원래 제 자리인 것마냥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일일이 짝을 맞춰야 한다는 특수한 질서로부터 해방되어, 일상 속 장면이 보편으로 돌아가는 쾌적한 감각을 선사한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빛깔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생김새. 자칫 깨트리거나 잃어버려도 언제든지 다시 비슷한 걸 되찾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을 소란스럽게 할 일이 없다. 자기주장이 강한 온갖 사물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마음을 가뿐히 건져 올려, 말도 없고 손길도 없이 피로해진 마음을 담담하게 위로해 온다.
아직 오늘의 기분이라는 게 형성되지도 않은 허여멀건한 시간대, 혹은 사물의 위치를 내 맘대로 둘 수 있는 조그맣고 알찬 탁상에 소리 없이 다가와 태연하게 놓이는 흰 컵이란, 마치 얌전히 놓인 흰 편지봉투 위에 사뿐히 얹은 우표와 같은 존재이다. 결코 주인공이 될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순간 그 어느 주변의 사물보다 귀엽고 믿음직한 효용을 남겨두고 가는 가벼운 일용품이자 기호품. 너무도 평범해 타인의 고집과 기호가 배재된 탓에, 놓일 때마다 익명의 그러나 틀림없이 나만의 것인 내러티브를 남겨두고 간다. 흰 컵이 놓인 책상의 풍경은 어수선하게 흐트러져 있던 주변의 오브제들을 보이지 않는 아우라로 결속해 볼품없는 일상에 질서를 만들고 소박한 정물화를 빚어낸다. 다시 찬장에 갇히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가 언제든 놓이면 한결같이 비슷한 복제의 마술을 펼친다.
언제 어떻게 사용하든 섣불리 일상의 맥락을 휙 바꿔 놓지 않는 물건은 다정하다. 물을 마시든 우유를 마시든 주스를 마시든, 아침에 사용하든 저녁에 사용하든, 예상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사소한 변주를 허용한 채 비슷한 일상을 복제하는 기본의 물건. 그래서 안심스럽고, 원래의 느슨한 질서를 되찾게 하는 물건. 묵묵히 손을 타고, 입술에 와 닿는 순종적이고 신중한 물건. 물건 뒤의 창작자가 담아냈을 고집과 개성, 어떤 창의성의 흔적과 겨룰 필요 없이 그저 들고 따르고 마시면 되는 단순하고 친절한 일용미학. 나를 유혹하는 무수한 물건들에서 해방되는, 한 잔의 여유로운 순간을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