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의 사물 세 번째, 우유
아침에는 콘푸로스트에 부어 먹고, 저녁엔 컵에 따라 마시고, 어쩔 때는 카스테라와 함께, 주말에는 종종 고구마에 곁들여 마시는 우유 한 잔. 일상의 부드럽고 포근한 음식들과 유독 어울리는 우유는 그 순수한 빛깔 덕인지 단출한 식탁을 화사하게 밝힌다. 동그랗고 납작한 접시와 형태와 빛깔이 단순한 음식들과 함께 식탁에 놓이면 그 풍경이 마치 정물화를 연상시켜, 특유의 고요하고 사뿐한 존재감에 일상의 화면이 담백하게 완성된다.
우유는 홀로 컵에 담겨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는 단정하고 얌전한 느낌을, 다른 따뜻한 음식과 함께할 때는 다정하고 발랄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혼자 마실 때는 다소의 긴장감과 위안이 느껴지지만, 다른 누군가와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깨끗한 포용을 내비친다.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차가운 물 한 잔보다 차가운 우유 한 잔을 건네받을 때 우리는 정겨운 온기를 느끼게 되고, 보통 우유 한 잔만 나오는 경우는 드물기에 덩달아 토스트나 비스킷의 맛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니까 손님에게 우유를 건넬 수 있는 집은, 적어도 불행에서 한 발짝 비껴가 있다는 편안한 낙관마저 든다.
낙관. 즉, 우유가 있는 일상은 희망차고 안심스럽다. 비단 그것이 키를 크게 하고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하루에 한 잔은 꼭 우유를 마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뿐한 걸음으로 달려가 무심코 냉장고를 열 때마다, 우유는 예외 없이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별일 없다면 그곳에 당연히 있을 거라 믿을 수 있는 그 든든함이, 엄마가 일하느라 집을 비운 무수한 낮동안 나를 키웠다.
어른이 되어 혼자 지내는 이제는 텅 빈 집 안의 냉장고에 우유를 채워두는 건 나의 몫이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종종 마트에 들러 우유 930ml 한 갑을 사서 집으로 향한다. 손에 실린 우유 한 갑의 무게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딱 적당하여, 너털너털 돌아가는 발걸음이 사뿐해진다. 우유를 구비해 두는 일상 속 단순한 의식은 무탈한 하루의 훈장이자, 앞으로 며칠 간의 나날이 무사할 거라는 낙관의 증표다.
인생의 궤적 속에서 어떤 지점을 찍어도, 우유가 있는 일상을 상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트에 들러 우유를 사서 한 손에 들고 집에 돌아오는 일은 어디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후에 만약 지금과는 정반대의 곳에 있더라도 우유를 한 손에 들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가는 하루를 분명히 상상할 수 있다. 다만 걷는 골목의 풍경과 우유의 상표만이 다를 뿐이다. 우유 한 갑을 사는 하루를 상상하는 일로 우리는 작고 가까운 미래를 담담하게 마중 나갈 수 있다. 우유라는 평범한 일상의 사물을 좌표로 삼고, 우리는 폭풍 같은 인생의 궤적 속에서 나의 애틋한 지난날로부터 이어지는 생활의 한 조각을 발견한다.
날 키운 한 잔은 어느덧 단순하고 무해한 습관이 되어 오늘의 식탁 위에 놓인다. 우유는 지금의 풍경을 안심스럽게 만들고, 앞으로 걸어갈 나날에도 당연한 것처럼 놓여 있을 것이다. 변화무쌍하고 천덕스러운 일상을 느슨하게 붙잡아 제자리에 앉혀 둘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스틸라이프, 그것이 우유의 애틋한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