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답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답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가벼운 답장을 하는데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고작 'ㅇㅇ' 하나 남기는데에도 족히 이틀은 걸려, 스스로 놀라는 날들의 연속이다. 바로 답장할 수 있는 간단하고 유쾌한 연락도, 한 번 슬쩍 보고, 반가워하고, 이따 답장해야지, 하고 미루다가 잊고,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이 흘러 이제와서 답장하기에도 민망한 지경에 이르러 그만 포기하고 만다. 벌써 그렇게 몇 달이나 미룬 답장도 있다. 그렇지만 뇌는 멀쩡하고 그 모든 연락들을 잊은 것은 아니라서, 그 전하지 못한 모든 답장이 지붕 아래 엮은 메주처럼 마음에 주렁주렁 얹혀있다. 늦봄부터 나타난 괴이한 증상이었지만 애써 잊고 지냈는데, 여름철이라 그런지 이제 퀴퀴한 냄새가 스몰스몰 올라오기 시작해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말을 잃었는데, 손가락마저 파업이다. 얌마, 너라도 일해야지! 주저리주저리 말할 수 없으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라도 해야지. 그래야 마음들이 전해지지. 그렇지만 손가락이 너무 무거워 도무지 움직일 수 없다. 손바닥만한 화면 위 작은 조약돌의 군집 같은 자판이 징그럽다. 그 위에서 활자를 조합하는 일이 꼭 지팡이 없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처럼 느껴진다. 몸서리쳐질만큼 매끄러운 화면을 쓸어내리고 두드리는 모든 손가락의 감각이 견딜 수 없어질 즈음, 앗 그만 파업해버렸다. 참나, 누구 맘대로.
늦은 밤에도 괜찮으신가요? 해가 진 이후에도 연락을 받으시나요? 그렇게 묻는 것은 구차한 일이므로, 짐짓 앞서 짚고 해가 지면 내일로 넘긴다. 아무래도 저녁 이후에 전하는 모든 답장이 결례처럼 느껴져 몸과 말과 손가락을 사리게 된다. 그 아무도 나의 무례를 손가락질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해가 뜨면 할게요. 문제는 막상 다음 날이 오면,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겨우 저녁이 되어서야 나의 의무를 주섬주섬 추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 또 안녕히, 내일 해가 뜨면ㅡ내일이야말로 꼭ㅡ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미뤄 온... 문자, DM, 카톡 그리고 메일에 답장하는 일, 일, 일.
텍스트 뒤에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메일 너머에는, 모니터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회사 다닐 동안 명심하고는 했다. 그러한 정직하고 겸손하고 예의바른 지침은 나의 방패이자 무기였고, 늘 손가락을 두드리며 맑은 날에는 행운을 비오는 날에는 안위를 빌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텍스트 뒤에, 말풍선 너머에, 메일창 뒤편에 사람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나를 망설이게 하고 조심스럽게 해서 도무지 아무렇게나 말, 말,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안부를 전하고 물어. 시간을 들여야지. 그렇게 항의하며 저 멀리 물러나 있는 배짱 두둑한 손가락들. (엿이나 먹어라). 그렇다면 하루에 딱 한 문장만 말해. 하나의 답장을 어떻게든 해내도록 해, 라는 말로 구슬려 본다. 건넨 손을 잡을 생각 없이, 잔뜩 웅크린 손가락들. 야, 이제 그만 화해할 생각 없냐.
기다려(줘). 내일 낮에. 해가 뜨면.
(하고, 아직 제 답장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