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희의 그림 읽기 (27)
얀 반 에이크, 남자의 초상화(자화상?) or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1433, 26x19cm, 패널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15세기 플랑드르(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 미술의 창시자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5~1441)였다. 겐트와 브뤼헤에서 활동했던 그는 1430년대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이며, 유화 기법을 완성했다고 평가된다. 이때 북유럽에서 초상화는 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유행이었다. 이런 초상화의 유행은 기법, 소재에도 영향을 미쳤다.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린 이 사람은 화가 자신의 초상이라고 생각된다. 어두운 배경은 15세기 초반 플랑드르 초상화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었지만, 이후엔 풍경이나 건축 배경이 더 많이 그려졌다. 주로 초상화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그리고 따뜻한 삶에 대한 소망 등 실용적인 의미로 그려졌다. 오늘날 가문의 유산과 역사적 기록으로도 가치가 있다.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초상화는 두 약혼자가 결혼할 것임을 알리는 증표이기도 했다. 1428년 부르고뉴의 공작 선량공 필립 3세(Philippe le Bon III, 1396~1467)는 반 에이크를 포르투갈에 사절단으로 파견했다. 그는 선량공(善良公)의 신붓감인 공주의 초상화를 그려오는 임무를 맡았다. 초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은 반 에이크는 그 후 선량공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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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에이크는 중세 말 부르고뉴 궁정의 호사스러움을 정밀한 자연 묘사와 함께 세밀하게 그려 넣은 화가이다. 필립 3세가 그에게 맡긴 은밀한 외교 임무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고전을 읽고 기하학을 연구하는 등 박학다식한 학자이며 동시에 여행도 많이 다닌 화가였다.
반 에이크는 채색 삽화가의 훈련을 받았기에 빈틈없는 완벽한 묘사를 할 수 있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플랑드르와 부르고뉴의 극소수 유복한 이들만 볼 수 있었던 정교한 채색 필사본의 세계를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옴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 영화에는 수도원에서 필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도서[Book of Hours(Use of Evreux)], 1450~1460, 양피지에 채색 필사,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위 채색 필사본의 제작과정은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양피지는 송아지나 어린양의 가죽인 벨럼(Vellum)이 가장 우수했다. 상아와 귀금속으로 장식한 당시 채색 필사본 한 권의 비용은 넓은 토지나 최고의 포도 농장을 구입하는 금액과 맞먹었다. 사실주의의 극치를 이루는 그림은 바로 유화의 기법에 그 비밀이 있다.
유화 이전 대다수의 그림은 안료를 녹이는 용매(溶媒)로 계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Temperare)였다. 화가들은 색채가 있는 광물, 식물, 곤충을 갈아서 안료를 만들고, 노른자로 혼합하여 물감을 만들었다. 그러나 템페라는 빨리 건조하기 때문에 수정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미술을 대표하는 피렌체의 경우 지중해성 기후로 무덥고 습도가 높아 느리게 마르는 유화보다는 빨리 마르는 벽화인 프레스코화를 선호했다. 북해에 면한 플랑드르의 경우 습하고, 위도가 높은 추운 지방이어서 패널에 유화를 사용하였다. 즉, 기후에 따라 재료도 달라지고 기법도 달라진다. 유화는 템페라보다 마르는 속도가 느리기에 색채 혼합이 가능하다. 그래서 명암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유화를 보급시킨 플랑드르의 화가 후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는 '성스러운 팔'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동생인 람베르트(Lambert)와 누이 마르가레테(Margarete)도 모두 화가였다. 형인 후베르트는 [어린양에 대한 경배]의 아래 중앙 부분을 스케치하던 중 1426년 세상을 떠났고, 이후 1441년 사망한 동생 반 에이크와 함께 겐트 역사 지구 외곽의 성 바봉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동생 얀 반 에이크는 유화기법을 더욱 발전시켜 아마씨 유를 사용하여 얇게 여러 번 덧바르며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반 에이크는 현미경으로 보는 듯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모나리자에 다섯 번까지 덧발랐다.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부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아주 작은 이 작품은 반 에이크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반 에이크 이후로 초상 화가들은 생생한 표정과 손동작과 함께 3/4 측면으로 대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에 그려진 남자는 배경에서 두드러져 보이며 관람객에게 눈으로 말을 건넨다. 붉은 터번을 쓰고 눈동자의 실핏줄과 홍채, 충혈된 흰자위, 수염 난 자리와 땀구멍 그리고 중년의 움푹 들어간 눈언저리와 주름이 요즘 모공까지 보이는 HD TV에 버금간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가야만 한다. 패널화는 국제적인 규약에 의해 비행기에 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건조와 진동으로 인해 갈라진 유화 조각이 떨어지는 박락 현상(Flaking)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얀 반 에이크의 [남자의 초상화, 1433]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이다. 예전에 그 갤러리의 나의 ‘최애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빈치가 속상하겠지만 사랑은 변하는 게 속성이다. 반 에이크 작품은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 22~23점이지만, 서명을 남긴 건 20점뿐이다.
얀 반 에이크,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반 에이크는 액자 상단에 새겨 넣은 글씨 같은 기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반 에이크(Van Eyck)를 사용한 말장난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Als ik Kan'라는 그리스어 좌우명이 쓰여 있다. 하단 프레임에는 라틴어로 '1433년 10월 21일, 얀 반 에이크는 나를 그렸다'라 적혀 있다.
얀 반 에이크, [마르가리타 반 에이크 초상 Portrait of Margareta van Eyck 또는 마르가리타, 예술가의 부인] 1439, 패널에 유채, 26x32.5cm, 브뤼헤 그뢰닝 미술관(Groeninge Museum)
반 에이크는 아내인 33살의 마르가리타를 그리고 서명을 남겼다. 이 그림은 한 쌍으로 제작된 펜던트(Pendent)이다. 당시 아내의 초상화만 그리지 않았기에 당연히 남편 초상화도 그렸다고 추측했다. 이런 이유로 [한 남자의 초상]을 반 에이크의 초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패널의 크기가 다르기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남자의 초상화(자화상?)]에 물음표를 적어 놓았다.
이 작품은 비문(碑文)으로 '내 남편이 나를 만들었다'라 쓰여 있다. 마르가리타의 헤어스타일은 당시 유부녀들이 하던 깔끔하게 올린 양머리 모양이다. 부르고뉴 시대에는 넓은 이마가 유행이라서 일부러 앞 머리를 뽑았다.
이 작품은 얼굴과 손 그리고 어깨의 조화가 어색하다. 얼굴 아래를 가리고 보면 완벽한데 전체를 보면 볼수록 이상하다. 물론 당시 북유럽은 이탈리아처럼 인체 해부를 할 수 없어 비례가 떨어지는 누드를 그렸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72년 후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표현하기 위해 30여 구의 해부를 하며 그가 죽을 때까지 수정을 거듭했다.
그렇지만 반 에이크가 누구인가? 그는 1432년에 사실적이고 완벽한 [어린양에 대한 경배]를 그린 걸출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그린 그의 말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거나 뭔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이 그림 속에 품고 있다는 추정이 든다. 마치 추사의 마지막 글씨, 봉은사의 ‘판전(版殿)’에서 고졸한 미를 표현한 것처럼 그의 말년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반 에이크는 1441년에 사망했고, 이 그림은 1439년에 그려졌기에 현재 전해지는 그의 가장 마지막 작품이다.
[마르가리타 반 에이크 초상] 부분: 2008년부터 [르네상스 얼굴 전시회]를 위해 영국 내셔널갤러리에 대여되었고, 복원과 과학적 조사도 이루어졌다.
마르가리타는 정밀 화법으로 그림을 그린 완벽주의자인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도도하고 기품이 흐르는 눈매와 꽉 다문 입은 지적이지만 만만치 않은 상류층 여인의 오만함이 엿보인다. 상인 계층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은 시대인 만큼 실리적이고 계산적인 냉정함을 풍긴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아르롤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보이는 반 에이크를 이렇게 묘사한다. "반 에이크는 중세의 긴장되고 격렬한 생활에서 초연하게 벗어난 사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단순 명료한 사람, 혹은 꿈을 꾸는 사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초상화를 바라보는 즉시 일반적인 인상을 받는다. 일반적인 인상이란 형태와 색조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심미적 인상을 즐기는 시간은 찰라이다. 천천히 이 작품이 주는 인상을 음미하며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누가 왜 그리게 되었는지에 집중하며 오래도록 바라봐야 한다.
그러다 초상화의 주인공과 감정적이며 심리적인 교류를 하게 된다. 때론 순간적인 인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의 드라마틱한 일생이나 그의 시대에 마음이 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 속 주인공의 삶을 반추하며 교훈을 얻기도 하고, 상처도 치유하고 위로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