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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금희 May 05. 2024

얀 반 에이크 [어린양에 대한 경배] 1

최금희의 그림 읽기 (28)


벨기에 겐트의 성 바봉 대성당에 있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5~1441)의 [어린양에 대한 경배]는 통상적으로 ‘겐트 제단화’라 불린다. 이 작품은 가장 많이 도난을 당한 미술품으로도 유명하다.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1566년 성상 파괴 운동이 최고조 일 때 수도사들은 이 제단화를 성 바봉 대성당의 탑에 숨겼다. 1794년부터 1815년에는 나폴레옹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져갔으나, 나폴레옹 실각 후 반환되었다. 일차대전 후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다시 돌려받았다. 이후 1934년에 다시 나치에게 강탈당했다.

 얀 반 에이크, 어린양에 대한 경배(닫힌 상태), 1432,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x51.4cm, 가로 5.2mx 세로 3.75m, 겐트 성 바봉 대성당


영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 The Monuments Men]은 미술사학자와 건축가 등이 스톡스 교수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모든 것이 집대성된 [어린양에 대한 경배],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 렘브란트의 자화상 등 도난당한 예술품을 찾는 실화이다. 1945년 헤르만 괴링과 히틀러에 의해 약 500만 점의 예술품이 약탈되어 오스트리아 알타우세 소금광산에서 숨겨놓은 작품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패망한 나치가 일부는 불을 질러 완전히 멸실되었다.


알타우세 소금광산에서 숨겨놓은 겐트 제단화를 찾아내는 사진. 출처: SFGATE


모뉴먼츠 맨이 결성되기까지 수백만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예술품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우려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유산인 예술품이 한 번 훼손되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고, 후손을 위해 예술품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미술관 관장과 미술품 거래상을 비롯한 비전문가들인 수백 명의 모뉴먼츠 맨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지켜낸 예술품 중 대표작이 바로 [어린양에 대한 경배]이다.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도 1420년 경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플랑드르에는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을 고대 그리스 로마 유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세부 묘사에 치중하며, 사물 그대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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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 요한], [판관] 패널 두 개가 도난을 당했다 (출처: 네덜란드 관광부)


1934년 4월 10일 저녁 [세례 요한], [판관] 패널 두 개가 도난을 당했다. 자신들이 패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세례 요한]은 돌려주고 백만 프랑을 요구했으나, 아직 [판관]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훔쳐간 이가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 이후엔 별관 방탄유리에 보관해 왔다. 


나는 [어린양에 대한 경배]를 직접 볼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했었다. 널리 알려진 <곰브리치 미술사>에서 따로 별지를 만들어 도판을 실어 놓았다.  겐트 제단화는 여러 폭으로 된 다폭제단화로 폴립틱(polyptych)이다. 아침 일찍 출발해 닫힌 상태의 12개 패널이 열리는 오전 10시를 기다렸다. 어떤 패널부터 어떻게 열릴 것인지 일행끼리 얘기를 나눴다. 


겐트 제단화는 1815년 이후 분산되어 오다가 25점은 원작으로, 도난당한 [판관]은 복제본으로 전시하고 있다. 최근에 아침저녁 공기의 기압 차이에 의한 압축 공기로 철근 프레임을 개폐하는 3천만 유로(약 393억)에 달하는 새로운 케이스에 보존하고 있다. 상부 패널의 닫힌 모습에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위 사진 오른편 성모 마리아 쪽 패널이 가장 먼저 열린다.


얀 반 에이크, 어린양에 대한 경배(열린 상태), 1432,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x51.4cm, 가로 5.2mx 세로 3.75m


병풍처럼 전체가 열린 상하단 모습으로, 상단은 천상 세계이고 하단은 인간 세계이다. 고지에 의해 신의 아들로 이 세상에 강림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아담과 이브는 원죄의 사함을 받고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성서를 이미지로 담았다. 



상단 중앙의 데이시스(Deesis) 도상


중세 비잔틴 미술의 이콘(Icons, 성상화)으로 ‘데이시스’는 그리스어로 탄원, 기도의 뜻이다. 데이시스(Deesis) 도상에서 옥좌의 심판자 하느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중재자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을 배치한다.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 ‘기도가 책이 되고 향이 된다’'라는 구절을 시각화한 것이다.


              비잔틴 이콘 데이시스


비잔틴 벽화의 데이시스에는 그리스도가 그려진다. ‘언제나 어느 곳에나 하느님의 영광이 임재한다’는 의미로 배경을 그리지 않고, 금박이나 금색으로 칠하여 그 광휘를 드러낸다. 비잔틴 성화는 옷을 만들 때 본을 대고 천을 자르듯 그림도 본을 대고 표시를 한 다음 선을 이어가며 그렸다. 그런 뒤 정해진 규약에 따라 색칠을 했다. 그렇게 공방에서 찍어내듯 그렸기에 화가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아 화가에 대한 기록도 없다.


예술사가인 어윈 파노프스키(E. Panofsky)는 “얀 반 에이크의 눈은 동시에 현미경과 망원경처럼 작동한다”라 말했다. 그래서 나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방탄케이스와 5m가 넘는 높이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 


위엄에 넘치는 전지전능 한 하느님의 모습이다. 교황을 상징하는 삼중관을 쓰고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옥좌에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들었다. 손을 든 축복의 자세로 금색 의자에 정면으로 앉아 있다. 이는 이교도의 신 제우스의 형상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엄지, 집게, 가운데 손가락을 편 손은 ‘정의’의 선언이나 선서이다. 위 사진의 진주로 장식한 망토 자락에는 그리스어 비문으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새겨져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 많은 화가들이 빨강을 애호했다. 아주 일찍부터 빨강은 다른 어떤 색보다 다양한 색조로 변조되고 섬세한 색조의 유희를 벌였다. 예술가들은 빨강으로 회화적 공간을 구성하고, 강약을 드러냈다. 고대 로마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플리니우스(Pilnius)의 <박물지, 기원후 77년>에 어느 색보다 빨강에 대해 수다스러웠다. 


반 에이크는 등장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색조의 강약을 현명하게 이용한 화가였다. 그는 1432년에 완성한 이 제단화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적절하게 빨강을 시용하여 강약을 주고 리듬감과 운동감을 주었다. 이후 반 에이크는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1433]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 1440년경]에서 지속적으로 빨강을 애호했다. 


얀 반 에이크,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 1440년경, 참나무에 유채, 30x21.6cm, 출처; 베를린 국립 회화관


반 에이크는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초상]에서는 브뤼헤에 살던 이탈리아 루카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아르놀피니(Arnolfini)를 자기 회사에서 만든 짙은 빨간색 천으로 터번을 두르고 호사스러운 외투를 입고 등장시킨다. 붉은 터번은 혈색 없는 그의 누런 얼굴과 긴 코, 움푹하게 들어갔지만 외까풀의 가는 눈과 날카로운 하관과 독특한 조합을 이룬다. 반 에이크가 같은 인물은 두 번 그리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 경우는 매우 친분이 깊었던 모양이다.


뒷면 황금 비단의 펠리컨은 새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부리로 자신을 가슴을 쪼아 그것을 먹였다. 그리하여 펠리컨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간 대신 속죄한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도상으로 흔하게 성물과 건축 장식에서 사용한다. 펠리컨 주위를 장식한 포도나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흘린 피의 상징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예수의 형상을 그리는 것은 우상 숭배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았을 때 천에 새겨진 그림이 있다. 그에 따라 예수의 얼굴은 완벽한 W자형 수염인 좌우대칭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초상화법을 이용해 반 에이크는 비잔틴 양식에서 가져온 금색의 배경을 대좌로 응용하였다.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금은 성스러운 의미를 갖진 않지만 신성함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또한 장식적인 우아함을 특징으로 하는 국제 고딕(International Gothic) 양식이 14세기말에서 15세기 초까지 전 유럽 봉건 궁정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여러 장의 패널의 앞뒤로 그려진 이 제단화는 평소에는 칙칙한 외관의 닫힌 상태로 유지되다가 축제날에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성모 마리아]의 청색 의상과 [하나님]의 적색과 녹색의 [세례 요한]과 금색의 고딕식 벽감이 드러나며 원색의 강한 대비로 찬란하게 빛난다.


발 앞에 놓인 왕관은 세속적인 ‘왕 중 왕’을 의미한다. 


반 에이크는 자연주의에 추구하여 인물을 실제 크기로 그려 제단화를 펼치면 전체 크기가 가로 5.2 x 세로 3.75m이다. 벨기에는 2012년부터 약 28억을 들여 복원을 시작하였다. 2019년 복원을 마친 뒤라서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등 화려함이 도판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 선명함을 그대로 전해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오전 10시에 [어린양에 대한 경배] 오른쪽 패널부터 천천히 열리는 순간 좌중은 침묵과 경외하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 숭고함에 압도당한 관람자들은 종교를 떠나 경건한 마음으로 고요한 침묵을 지켰다. 중세의 가을인 1432년, 즉 지금으로부터 591년 전에 북유럽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얀 반 에이크의 손에 의해 인류 최고 유산이 탄생하였다. 그 걸작을 보전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 ‘모뉴먼츠 맨’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 나는 최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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