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막기의 종말, 그리고 신속채무조정
더 이상 뺄 수 있는 대출이 없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잔여 카드 한도 안에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던 생활도 이제 한계였다. 그동안 연체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용이 허락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비싼 이자를 감수하며 추가 대출로 숨통을 틔워보기도 했고,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려 휴대폰 소액결제에 손을 댔다. 남은 카드 한도로 온라인 상품권을 사서 제휴 포인트로 전환한 뒤 현금으로 출금하는, 소위 '상품권 현금화'까지 감행했다. 사악한 수수료를 떼이더라도 당장의 연체를 막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돌려막기의 끝은 결국 더 거대한 빚의 파도였다.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다. 더 이상 융통할 현금도, 남아있는 카드 한도도 없다. 며칠씩 늦으면서도 꾸역꾸역 맞춰오던 납부 일정은 이제 영원히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다가올 추심에 대한 공포였다. 당장 내일부터 걸려올 독촉 전화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나도 연체하기 싫어서,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서 죽을힘을 다해 버티다 이 지경이 됐다'고 울먹여야 할까.
확실한 납부 계획만 있다면 며칠 전화를 피하다 갚으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 '확실한 수'가 없다. 꼼짝없이 연체를 감당해야 한다.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내 이름 석 자 뒤에 붙게 될까 봐 심장이 조여왔다.
살 길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던 중 '신속채무조정'이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연체가 우려되거나 시작된(30일 이내) 채무자를 대상으로 원금 상환 유예와 이자율 감면을 지원해 주는 신용회복위원회의 제도다.
신속채무조정이란?
대상 : 연체 30일 이내 또는 연체 우려자
내용 : 최장 10년간 원금 분할 상환, 연체 이자 감면
핵심 장점 : 접수 즉시 채권 추심 중단, 신용점수 하락 방지(연체 정보 미공유)
나처럼 연체 직전이거나 초읽기에 들어간 사람에게 '추심 중단'은 구원이었다. 접수 다음 날부터 독촉 전화가 멈춘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 지옥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획을 세울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신속채무조정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장점은 최장 8개월간의 유예 기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 접수 후 확정까지 약 2개월, 이후 6개월간 이자만 납입하는 거치 기간을 합치면 본격적인 원리금 상환까지 약 8개월의 시간을 벌 수 있다. 매달 카드값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이들에게는 삶을 재정비할 소중한 골든타임이 생긴다.
물론 망설이게 만드는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한다. 가장 큰 단점은 원금 감면이 전혀 없다는 사실. 상환 기간을 최장 10년까지 늘리고 이자율을 낮춰주긴 하지만, 워낙 장기간 갚다 보니 결국 원래 채무보다 더 많은 금액을 상환하게 된다. 성실하게 갚으려는 의지에 비하면 혜택이 다소 박하다는 체감이 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점 때문에 금융회사의 부동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다는 특징이 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이자율을 깎아주더라도 채무자가 파산하지 않고 장기간 원금을 다 갚아주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무자의 상환 의지만 확고하다면 승인이 거절될까 봐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다. 추가로, 모든 채무가 조정 대상에 포함되기에 신용카드 사용이 불가능 하다는 점도 생활 패턴의 큰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속채무조정의 신청 조건은 간단하다.
채무액 15억 이하 (무담보 5억, 담보 10억)
최근 6개월 내 신규 채무가 총액의 30% 미만일 것.
연체 전이라면 신용점수 하위 10%(NICE 또는 KCB 중 하나만 충족해도 됨)
나는 연체 전이었지만 신용점수가 이미 바닥(하위 10%)이었기에 다행히 신청 자격이 주어졌다. 가장 걱정했던 '가족, 직장에서 알게 될까'하는 부분도, 접수 후 추심이 중단되기에 신속채무조정 접수 전에 우편물 주소지를 변경하거나 대리 수령 서비스를 이용하면 충분히 대응 가능했다.
신용회복위원회는 100% 방문 예약제로 운영되는데 보통 한 달 치 예약이 가득 차 있다. 이럴 땐 다음 방법을 추천한다.
거주 지역 외 다른 지부의 빠른 날짜 확인하기
늦은 저녁이나 수시로 새로고침하여 예약 취소분 잡기
사이버 상담보다는 지부 방문 예약이 일정 잡기에 더 수월하다.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본 뒤, 나는 결심했다. 이 굴레를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다면 제도의 도움을 받기로. 비록 원금 감면은 없더라도, 8개월이라는 시간과 독촉 없는 일상을 사는 대가로 '성실한 상환'을 선택하기로 했다.
신용회복위원회 앱을 설치하고, 상담 날짜를 선택하는 손 끝이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진동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실제 신용회복위원회를 방문해 상담받았던 생생한 과정을 공유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