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란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국가나 사회, 그리고 남을 위해 힘을 보태는 일이라고 한다. 내가 해본 봉사라면 노인복지관에서 1년 남짓 밥을 나눈 일이 전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마을 통장을 맡아보라는 권유가 들어왔다. 동네의 자질구레한 일을 앞장서서 해보라는 것이었다. ‘봉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말에 조금은 마음이 기울었고, 거기에 약간의 수고비까지 나온다니 금상첨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늘 언저리에서 조용히 지내던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더구나 전임 통장은 재건축 문제에 휘말려 끝내 사표를 던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부담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은근히 호기심이 일어, 결국 못 이기는 척 맡아보기로 했다.
1987년 7월에 이 동네 오동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드나드는 출입구가 하나뿐인 “ㄱ”자의 좁다란 골목 안집,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에 퇴근을 하는 일상 속에서 동네 사람들과의 접촉도 별로 없이 오직 내 삶만 살아온 동네다. 동네 옆 하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비와 태풍이 올 때마다 넘치고 물이 들어와서 비만 오면 이상한 긴장감에 전전긍긍하게 되는 30년을 넘게 살아 온 동네다. 이 동네에 2017년 11월부터 내가 통장이 되는 것이다. 막상 통장 추천은 받았지만 주민들 지지표도 받아야 되고 또 다른 경쟁자도 있어서 잡다한 공부도 해야 했다. 언저리에 조용히 비껴 나 있던 나를 동네주민 언니가 집집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지지표도 받게 하고 인사도 시키고 하면서 안면을 트게 만들어 주었다. 전 통장은 명단을 건네주면서 구석구석 주민들 동태를 다 알려 주었다. 이렇게 나는 여러 지지와 도움을 받으며 통장이 되었다.
동네의 특징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동네다.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니라 도심 속의 빈민촌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서 30년을 넘게 지내 온 세월인데 동네가 이렇게 늙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전. 출입이 잦은 특징도 있었다. 모텔이나 여관에 얼마 묵지도 않으면서 전입신고를 하고는 또 훌쩍 퇴거는 안 하고 떠나는 경우도 허다하고 요양병원에 입원해서도 전입신고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민등록 확인 조사를 할 때는 모텔이나 여관에 전입신고 된 사람을 찾아서 어두침침한 곳을 일일이 방문하여 실거주 확인을 해야 했다. 방문할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통장 이름표를 달고 몇 번씩 출구 확인을 하면서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찾아 방문을 반복하곤 했다.
개인 주택지는 또 별세계였다.. 조그만 동굴 같은 집에서 어르신들이 살고 계셨다. 젊은 사람 아니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이런 어르신들의 동네를 목소리를 높이며 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동네 소식지나 구호물품 나오는 건 철저하게 공명정대하게 서운함이 생기지 않도록 고루 나눠 주리라 마음먹었다. 옛부터 먹는 끝에 마음 상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 세상에 무슨 구호물품인가 하겠지만 철마다 구호물품이 많이 나왔다. 그만큼 생계가 안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김장철에는 김장김치를 20여 가구에, 여름이면 선풍기며 이불이며 보양음식이 계절에 맞게 나온다. 매달 국이며 반찬이며 미숫가루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나와서 소리 없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심도 되었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우리가 살아낸 세월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득 뒤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적막하고 무의미한 현실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살아가는 의미가 되고 나쁜 기억도 무력한 현재를 고양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아지는 세월이 되어 버렸다. 속절없이 가난하게 늙어 가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하염없이 세월 탓을 해본다. 어둡고 침침한 동네에 가로등을 교체, 신설할 기회가 생겨 골목골목마다 환하게 어둠을 밝혀 드리고 스스로 뿌듯함에 나 자신에게 칭찬도 해본다.
2019년 10월 태풍 미탁이 왔을 때는 천둥과 번개도 다른 때 보다 더 무섭게 우르릉 번쩍 거렸다. 하천의 물은 다리를 넘쳐흘러 출렁일 때 천둥, 번개 치면 꼼짝도 못 하는 내가 몇몇 통장들과 범람하는 하천을 지켜보며 노심초사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발을 동동 굴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던 기억도 새롭기만 하다.
그러는 와중에 부려먹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나와 통장 경쟁에서 낙마한 주민인데 걸핏하면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하루는 벌에 쏘였다며 119를 좀 불러 달라고 하였다. 나는 얼결에 119에 전화할 줄을 몰라 내가 아는 번호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주민이 벌에 쏘였다고 119 번호 좀 알려 달라고 했다. 주민센터 직원은 막 번호를 찾더니 소방서 전화번호라며 알려 주었다. 나는 또 그 번호로 전화해서 “119 죠” 여기 벌에 쏘였다고 벌집을 좀 제거해 달라고 했더니 여기 소방서이기는 한데 부서가 다르다고 “1,1,9번”으로 전화하라고 했다. 앗! 차차 싶었다. 그냥 119로 전화하면 될 것을 모두들 119는 따로 번호가 있는 줄 알았을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크고 작은 사건도 많은 4년의 통장직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어르신들을 대하다 보니 호칭이며 인사며 목소리를 높여 모든 일에 스스럼없는 마음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음은 분에 넘치는 복으로 생각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동네가 보이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지만 습관적으로 내려다봐지는 아픈 손가락 같은 동네다. 주민 반 이상이 동네를 떠난 상태이기는 하지만 부디 하는 재건축이 순조롭게 해결되어 모두들 편안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