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라는 글제를 받고 다소 막막하였다. 노래와 그리 친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써야 되나. 유행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시대의 감정과 분위기를 반영하는 존재라는 인터넷 글을 읽으면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그렇지 이런 멋진 프로그램이 있었구나 하고 궁금증이 일어났다.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는 MBC표준 FM에서 2021년 한 해 동안 매일 오전 11시 52분부터 낮 12시까지, 스페셜 방송은 일요일 아침 7시 5분부터 아침 8시까지 방송된 한국 가요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이라고 나와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지나간 프로그램이지만 제목에 끌려 자세히 읽어 보게 되었다.
매일 한 곡씩 어떤 노래가 불려졌나, 내가 아는 노래가 몇 곡이나 있을까 궁금하였다. 1월 1일 첫 곡이 방탄소년단의 Dynamite였다. 역시 내가 모르는 노래였다. 노래는 모르지만 방탄소년단의 열혈 팬은 한 사람 알고 있었다. 한 모임에서 만난 회원인데 나는 그때 방탄소년단의 멤버 얼굴도 모르던 시절, 물론 지금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 열혈 팬 덕분에 방탄소년단의 이름이며, 아미라는 말이며 콘서트를 하면 열 일을 제쳐 놓고 서울이든 어디든 참석하는 문화를 알았다. 저렇게 나이 많은 주부가 열혈 팬이 되어서 가수를 따라다니는 문화라니, 더구나 한창 공부하는 고등학생 딸을 꼬드겨 콘서트에 데려가기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렇게 엄마에게 붙들려 콘서트에 갔던 딸이 카이스트 대학생이 되었다는 말에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나는 또 노래목록을 열어 보았다. 어떤 노래가 있을까. 혹 HOT노래도 있을까. 물론 있겠지.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이니까. 내가 HOT의 팬이어서가 아니다. 딸이 중. 고등생이었을 때 열혈 팬이어서 다. HOT 노래며 춤이며, 특히 토니 안을 좋아했었다. 방에다 온통 브로마이드 붙여 놓고 교복도 HOT가 모델이었던 교복으로 사 입고 하던 시절. 콘서트 간다고 대절버스를 예약해 놓고는 눈치 보던 딸을 조금 더 커서 가라고 설득시키던 그때 그 시절. 딸이 시집간 지 10년도 더 되었건만 HOT CD는 아직도 박스 속에서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지나간 시절은 다 그때 그 시절이다. 1980년대, 따져 보면 수줍음이 많았던 내 젊은 시절이었다. 동시에 나만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꿈이 많았던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아쉬움이 남아 있던 시절.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고,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끝내 잡고 싶어 허공을 헤매던 날들이었다.
그 시절, 나는 가끔 막연한 꿈을 꾸었다. 세상 앞에서 나를 드러내는 꿈. 누군가의 시선을 받으며, 내 목소리로 무언가를 전하는 꿈.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내성적이었고, 소극적이었고, 무대는커녕 사람들 앞에 서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런데 그날, 난생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유행가를 불렀다.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직장 야유회에서였다. 마이크가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냥 넘어가기는 없기였다. 나는 가창력은 없었지만 빼고 도망가는 성격도 아니었다. 마이크를 잡고 조심스레 노래를 불렀다.
그날 야유회 참석자는 여자 직원 네 명과 40여 명의 남자 직원들. 긴장감 속에서도 노래를 이어갔다. 선명한 공기, 살갗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내 목소리. 박수갈채와 야유, 웃음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내내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었다. 무슨 용기로 마이크를 잡았는지. 그날의 작은 용기는 내 안에 여전히 빛나고 싶은 꿈이 있었다는 것일까.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365개의 노래 중에서 몇 곡만 모르는 노래고 거의가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였다. 노래를 틀어 놓고 같이 부를 때는 잘할 것 같아도 막상 사람들 앞에서 부를 때는 음치 중의 음치인 것이 발각된다. 지난달에 노래교실에서 생긴 일이다. 나이 들어서 노래를 부르면 좋다고 해서 간 노래교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노래교실이다. 아무리 동사무소에서 한다지만 회원들이 앉을 의자도 직접 창고에서 꺼내 앉는 실정이었다. 노래선생님이 매주 의자를 꺼내 회원들이 앉을 수 있게 해 주신다. 또 그런 거는 예의상 못 보고 있어서 조금 빨리 가서 의자 꺼내 정리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회원들이 올 때까지 노래를 선곡해서 먼저 온 사람에게 마이크를 주며 불러 보라고 하신다. 나에게도 두어 번 마이크가 왔지만 노래 못 부르는 나 스스로를 잘 알기에 마이크를 잡아 보지도 않았다.
날씨가 조금 풀린 그날, 선생님은 봄노래를 선곡해 오셨다. 봄노래 몇 곡을 부르다가 산 너머 남촌에는 곡이 나오고 나에게 마이크가 주어졌다. 마이크를 잡는 그 찰나에 온갖 삼라만상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산 너머 남촌에는 노래가 끝났다. 조용한 박수소리를 들었다. 모두들 나를 외면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왁자지껄 웃지도 않았다. 마이크를 건네주고 겉으로는 의연하게 어울려서 다른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마쳤다. 나는 노래를 망쳤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명곡을 내가 망치다니. 부끄러웠다. 이제 노래교실 못 가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노래교실 가서 노래를 망쳐 놓고 왔다고 했다. 이제 부끄러워서 노래교실 못 가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딸이 말했다.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있어야 그게 노래교실 묘미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어.” 딸 하고 둘이서 실컷 웃었다. 딸 하고 웃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풀려 노래교실 갈까. 아니야, 이번 주는 쉬어야겠어.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아들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대뜸 한다는 말이 노래교실 잘 다니고 있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산 너머 남촌에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서 노래교실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이 하는 말이 그건 엄마 생각이라고 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했다.
아들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정말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즐겁게 노래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거였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본다.
노래를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유행가처럼, 나도 내 인생을 나만의 멜로디로 부르고 있는 것일 테니까. 이번 주도 용기 내어 한 걸음 내디뎌 보기로 했다.
유튜브를 틀어 ‘산 너머 남촌에는’ 자꾸자꾸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