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아내의 시점
어느 날부터인가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새벽에 느닷없이 잠을 깬다. 특별히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가슴께가 자주 답답하기도 하고. 나이 탓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병원에서는 “큰 이상은 없다”라고 했다. 대신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덧붙었다. 특별한 병명이 붙지 않아 더 애매한 진단이었다.
스트레스는 소리 없이 찾아온다. 눈에 띄는 사건보다,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일들이 더 큰 몫을 차지한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한 일 사이에서 생기는 미묘한 자책, 괜히 삼킨 말 한마디,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에 남은 표정 하나가 조금씩 쌓인다. 그때는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고,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하지만 마음은 계산기를 들고 있는 모양이다. 하나하나 따로 보면 가벼워 보여도, 합계를 내면 무게가 달라진다. 참아온 시간만큼, 이해한 만큼, 양보한 만큼 고스란히 저장해 두었다가 어느 순간 몸으로 알려준다. 잠이 오지 않거나, 이유 없이 피곤해지거나, 괜히 짜증이 늘어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웬만한 일로는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아들의 늦은 졸업과 늦은 취업도, 그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가까운 이들의 ‘아들 취직했나’라든가, 또는 ‘사귀는 사람은 있나’ 등 이런 말들이 1등급 스트레스 말이다. 그러나 남편의 아픔 앞에서는 마음이 쉽게 무너졌다. 치료를 위해 이사까지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언제나 사람의 아픔에서 온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건강염려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었고, 그 사실이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됐다.
이런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여전히 사소한 일로 나에게 걱정을 준다. 수많은 걱정거리 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가 내 마음을 늘 조이곤 한다. 하나는 아침마다 나서는 산책이고, 다른 하나는 오후 시간을 보내는 바둑과 장기다. 언뜻 보면 모두 건전한 일처럼 보이지만,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데 있다. 무엇보다 본인이 환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적당히’라는 금쪽같은 지혜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다.
남편은 요즘 황토 맨발 걷기에 푹 빠져 있다. 요양병원에서 황톳길까지 빠른 걸음으로도 이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거기에 맨발 걷기까지 더해지면 체력이 어떻게 감당이 되겠는가. 내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잔소리라도 하면, 남편은 오히려 “알아서 한다”며 퉁명스레 받아치니 속만 더 상한다.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동네에서 함께 바둑을 두는 팔순 어르신 때문이다. 그분은 황톳길을 매일 같이 걸어 다니신다고 했다. 피부는 젊은이 못지않고 기백도 넘친다며, 비결이 바로 황토 맨발 걷기라고 자랑삼아 말씀하셨다. 남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마치 비밀 약속이라도 받은 듯 황톳길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그저 ‘적당히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뿐이다.
오후 시간이 되면 또 다른 근심거리가 시작된다. 동네 어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체력 소모야 크지 않겠지만, 지는 것에 예민해져 괜히 열을 올리고, 온 신경을 다 쏟아붓는 모습은 내 눈에는 마냥 걱정스럽다. 몸과 마음을 다 쓰고 나면 과연 기력이 남을까 싶다.
결국,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남편이 아니다. 문제는 ‘적당히’라는 선을 지키지 못하는 생활 습관이다. 여기서 말하는 ‘적당히’란, 몸이 감당할 만큼만 즐기고, 마음이 편안할 만큼만 몰두하며, 나머지는 여유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 경계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집스럽게 몰입하며 스스로를 소모해 간다.
나 역시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괜히 불안과 걱정을 키워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고, 조금은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겠지. 결국 ‘적당히’는 남편에게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었다. 나의 삶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필요한 균형이었다. 그 선을 지킬 때 비로소 스트레스도 함께 줄어든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제발, 적당히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