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아내의 시점
날씨가 참 좋았다. 공기도 맑고 햇살도 따뜻했다. 그동안 부었던 적금 만기날이 지났다. 남편과 약속한 대로 OO은행을 찾아 나서기로 한 날이었다. 남편이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에서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들었지만, 내가 남편 쪽으로 가기로 했다.
요즘 나는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이 여전히 서툴다. 정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네이버 길 찾기를 눌러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은 무턱대고 집을 나서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덕분에 버스 정류소에서 30분, 40분씩 길 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딸이 가르쳐준 대로 미리 버스 검색을 해두었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10분 남짓. 그 짧은 기다림조차 뿌듯했다. ‘나도 이제 조금은 이런 일에 익숙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남편도 오랜만의 외출이 반가운 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문 앞에서 마주친 그의 얼굴에는 가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웃음 하나에 마음이 놓였다. 잠시나마 병실을 벗어나 함께 길을 나선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손등에 닿는 바람이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남편이 있는 요양병원 앞에서 길 찾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폰을 꺼내 검색에 나서려고 한다. 성질 급한 남편은 미리 알아 왔다며 같이 버스를 탔다. 오거리에서 내려야 하는데 정확한 지명을 알지 못하여 우리가 아는 오거리가 아니라 다른 오거리에서 내렸다.
모르는 오거리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겨우 OO 은행 쪽으로 간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사님께 조심스레 여쭈니, 대답이 애매하다.
“직선으로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내리세요.”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자리에 앉아 곱씹어 보아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 달리는 버스가 어찌 일직선으로만 갈 수 있단 말인가. 길이란 늘 꺾이고 엇갈리며 이어지는 법인데 말이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노선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지명은 낯설기만 하고, 기사님이 말한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순간, 마치 수수께끼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기사님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 괜히 혼자 웃음이 났다.
‘뭐, 가보면 알겠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도 아니고 훤한 대낮에 길이라도 잃을까 하는 베짱이 생겼다.
버스는 이름 모를 동네들을 지나며 달리고, 창밖으로는 골목마다 다른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어느 곳은 오래된 간판이 삐뚤게 매달려 있고, 어느 곳은 새로 생긴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낯선 풍경 속에서도 사람 사는 기척은 비슷했다.
나는 창문에 기대어 흘러가는 풍경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인생길도 이와 다르지 않겠구나. 분명히 가는 방향은 있지만, 중간중간 뜻밖의 오거리에서 헤매기도 하고, 누군가의 애매한 안내에 의지해 길을 이어가기도 한다. 그 길 끝에 도착한 곳이 어디든, 결국은 나의 여정이겠지.
분명 은행은 높은 건물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창밖으로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기사님이 말한 지명을 물어보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마침 버스도 왼쪽으로 방향을 꺾고 있었다. 꺾으면 내리라는 말이 맞았다. 옆자리 손님이 우리가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준 덕분에, 우리는 번화가 한가운데 있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은 길 찾기 앱보다는 사람에게 묻고 또 물어가며 찾는 길이 더 사람 냄새나는 삶의 방식처럼 느껴진다.
날씨가 좋은 탓에 처음 와 본 신도시의 첫인상이 좋았다. 은행직원도 같은 동향 사람이라 더 정이 가는 말투였다. 오랜만에 고향의 말소리를 들으니 긴장하며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은행직원의 환송을 받으며 신도시에서 점심을 먹었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들어와 테이블 위를 따뜻하게 덮었다. 낯선 거리의 풍경도 그 햇살에 녹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식당 밖으로는 젊은 부부와 유모차를 밀고 가는 가족, 갓 심은 가로수 사이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보였다. 문득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그릇의 따뜻한 국밥을 마주하며 우리는 새로 시작되는 일상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두려움을 함께 나누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도 고향의 말소리처럼 반가운 인연들이 생기리라는 희미한 확신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았다. 점심을 마치고 나올 때, 하늘은 여전히 맑고, 마음은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