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23년에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국어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공연의 오디션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도 접했다. 아직 한국어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뮤지컬 배우들은 업계 최고 수준의 실력자들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배우들에게는 꿈의 무대고 뮤지컬 팬들에게도 하나의 성역과 같은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이 노래하는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인데 주옥같은 곡들로 가득하다.
나는 뮤지컬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좋은 공연을 위해서는 멀리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티켓값은 만만치 않지만 물건을 사는 소비보다는 경험을 사는 소비가 행복에 더 기여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에 대한 지출은 좀 더 과감히 하는 편이다. 공연 일이 가까워지며 느끼는 설렘과 관객석에서 라이브로 펼쳐지는 종합예술을 즐기는 호사는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공연 관람을 하는 동안 마치 오페라를 감상하는 유럽의 귀족이 된 마냥,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으매 감사한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 뮤지컬을 본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뮤지컬 한 편만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레미제라블을 추천하겠다.
런던에서 레미제라블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보게 된 계기도 재미있다. 아내와 같이 런던을 관광차 재방문하던 시기에 아내가 런던에서 꼭 뮤지컬을 보고 싶어 했다. 런던까지 왔는데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쌍벽을 이루는 런던의 웨스트엔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라이언 킹을 보고 싶어 했다. 런던의 레스터 스퀘어에 가면 각종 뮤지컬 티켓을 저렴하게 파는 여러 가게들이 있다. 그리고 한쪽 편에 공식적으로 티켓을 판매하는 원형의 매표소가 있다. 그날 여러 곳을 관광하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때쯤 레스터 스퀘어를 찾았다. 미리 예매를 하지 않은 상태라 공식 매표소를 찾았는데, 라이언 킹은 좋은 좌석은 이미 매진이 됐고 뒤 쪽 좌석만 몇 개 남아있는 것 같았다. 마감시간이 가까워지면 할인 티켓이 나올 때도 있다는 정보도 들었고 시간도 마감시간에 가까워져서 매표소 앞을 망설이며 서성이고 있었다. 다른 걸 봐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웬 훤칠한 백인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마르코라고 소개한 청년은 자신이 어학원(language school)에서 일하는데 단체로 학생들을 위해 레미제라블 표를 구매했다고 했다. 그런데 학생 2명이 나오지 않아서 표를 나에게 팔고 싶다는 것이다. 원래 45파운드 하는 티켓 2장을 각각 20파운드에 주겠다고 했다. 2장을 사도 표 하나 값도 안되니 좋은 거래이긴 한데 왠지 표가 진짜인지 믿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왔다고 설명하는 마르코를 믿고 싶었으나 런던은 관광지인지라 무턱대고 사람을 믿기는 어려웠다. 한참을 망설이니 자기가 극장으로 직접 데려가서 확인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를 따라 레미제라블 전용관으로 갔다. 레스터 스퀘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극장이 있었다. 극장 앞에서 표를 검표원에게 진짜인지 확인받고 와서 표값을 주겠다고 했더니 마르코가 하는 말, "It's not how it works(그렇게는 안 되겠어요)."
검표원에게 표를 보여주면 입장해야지, 다시 표를 가지고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고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오죽하면 마르코가 "I won't run away(도망가지 않을게)."라고까지 했을까. 검표원에게 표를 확인하는 동안 먼저 돈을 받은 마르코가 홀연히 사라질 수도 있음을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그는 눈치챈 듯했다. 결국 마르코에게 돈을 주고 표를 받아서, 검표원에게 다가가 표를 확인하니 문제없이 통과였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마르코를 돌아보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마르코는 그 잘생긴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역시 엄지를 들어주었다. 미안해 마르코. 내가 이렇게 사람을 못 믿는 인간이었다니..
마르코 덕분에 극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2층 맨 앞줄의 자리였다. 자리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대가 꽤 잘 보였고 우리 좌석 뒤로 올려다보니 까마득히 높은 곳에도 좌석이 있었다. 이 정도면 꽤 좋은데.
무대가 시작하고 장엄한 ' Look down(고개 숙여-간수들이 장발장을 포함한 죄수들에게 외치는 소리)'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다. 영국이 우리나라와 시차가 9시간 정도 나다 보니 시차증으로 피곤한 탓도 있었고 그 전날 밤 잠을 설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극이 전개될수록 빠르게 극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눈꺼풀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중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명한 뮤지컬 넘버 'I dreamed a dream(나는 꿈을 꾸었지요), Stars(별), On my own(나 홀로), One more day(내일이면), Do you hear the people?(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Bring him home(그를 집으로 데려다주소서)'와 같은 주옥같은 레퍼토리가 들릴 때면 열렬히 손뼉을 치고 때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냥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장엄하고 감동적이었다. 내 뒤에 Londoner(런던 시민)들이 나를 봤을 때 얼마나 웃겼을까? 동양에서 온 관광객이 꾸벅꾸벅 졸다 연신 박수를 치고 환호하기를 반복하고 또 조는 걸 보면. 그래도 유명한 넘버에서 졸지 않고 다 본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래의 사진들은 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 콘서트 실황에서 가져왔습니다)
극의 초반에 빵 하나를 훔치고 19년을 복역한 장발장은 세상에 대한 원한으로 이글거린다. 하룻밤을 재워준 미리엘 주교의 성당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잡혀 끌려온 장발장.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체포되어온 장발장에게 오히려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났느냐며 "Would you leave the best behind?" '최고의 것을 (가져가지 않고) 남겨두셨소?'라며 은촛대마저 쥐여준다. 이에 장발장은 감화받고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장발장에게 오히려 또 다른 은혜를 베푸는 미리엘 주교의 사랑은 큰 울림을 준다.
가난한 군중의 합창 'At the end of the day(하루의 끝에)'의 가사는 처절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투쟁이요, 전쟁이다. 하루가 끝난다는 것은 단지 하루 더 나이 먹고 하루 더 추운 날을 보낸다는 의미뿐이지. 의로운 이들도 서둘러 갈 길을 가지. 어린아이들의 울음은 외면한 채. 겨울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 (가난한 자들을) 죽일 준비를 하고'라는 가사가 가슴을 후벼 판다.
딸을 위해 몸을 팔며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찬란했던 젊은 시절의 꿈을 떠올리는 판틴의 'I dreamed a dream(나는 꿈을 꾸었지요)'. 어두운 밤에도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정의를 수호하겠다고 다짐하는 경감 자베르의 'stars(별들)' - 나는 특히 이 곡을 좋아한다. 악역으로 보이는 자베르이지만 자신만의 숭고한 정의에 관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1막의 신 스틸러 테나르디에 부부. 부부가 부르는 'Master of the house(여인숙의 주인)'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노래다. 여관집 주인인 남편 테나르디에는 '모든 것엔 대가가 있는 법'이라며 여관 투숙객들을 등쳐먹는 법을 다양하게 열거한다. '당신의 지갑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가 그의 모토다. 그럼에도 자신은 모두의 친구요, 철학자라고 자기 자랑을 유쾌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뒤이어 부인은 '내 젊어서 왕자님을 만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이런 벼룩 같은 인간을 만나게 되었나?'라 한탄하며 익살을 떤다. '자기가 대단한 사랑 꾼인 줄 아는데 거기는 뭐 별거 없던데'라는 대사에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진중하고 장엄한 레미제라블에서 유일하게 신나게 흥청거릴 수 있는 장면이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흥이 절로 난다. 레미제라블의 매력 중 하나는 악역들을 하나같이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다. 심지어 이 노래를 부르는 부부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장발장을 평생 추적하며 괴롭힌 자베르는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법에 대한 맹신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는 것이고 마냥 악인으로 평생을 사는 이는 드물 것이다.
피를 끓게 만드는 혁명의 노래 'Do you hear the people sing(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한데 가사도 멋지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이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그것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노래다. 당신의 심장박동이 (혁명의) 북소리와 함께 울릴 때, 내일이 오면 누리게 될 삶이 바로 거기에 있다.'
1막의 대미를 장식하는 'one day more(내일이면)'에서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신념과 사연을 외치며 자웅을 겨루듯이 합창한다.
중간에 intermission(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어디로 우르르 몰려가기에 따라 나갔더니 극장 내 pub(펍)으로 몰려가서 음료수를 주문하고 있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술을 파는 것 같아서 좀 놀랐던 기억이... 암튼 나도 하겐다즈 딸기 아이스크림 작은 통을 사서 아내와 나눠 먹었는데 하겐다즈는 역시 런던에서도 비쌌다. 그러나 맛은 작은 양에 비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에포닌의 가슴 절절한 노래 'on my own(나 홀로)'는 2막에서 단연 백미였다. 아름다운 선율에 흐르는 애달픈 가사. '나는 의지할 곳 없이 밤새 런던 거리를 걸어요. 내 상상 속에서 그와 함께 아침이 올 때까지 걷죠. 하지만 나는 알아요. 난 일생 동안 그런 척했다는 걸. 밤이 끝나고 그가 사라지면 세상은 갑자기 변해버려요. 내가 없이도 그의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어요. 그는 내가 결코 모르는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가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장발장이 전쟁터에서 마리우스를 구출해 집으로 데려가는 장면에서 부르는 'Bring him home(그를 집으로 데려다주소서)'. '신이여 이 젊은이를 이제 쉬게 하소서. 집으로 데려다주소서. 신이 허락하셨다면 제게도 있었을 아들 같은 이 청년을 부디 집으로 데려가소서. 여름(젊은 시절)은 쏜살같이 사라지고 나는 이제 늙었답니다. 그에게 평화를 주소서. 그를 살리소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대신에 그를 살리소서.' 양딸인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를 살리려는 장발장의 절절한 신에 대한 기도가 깊은 감동을 준다. 이 글을 적느라 레미제라블 25주년 공연을 조금씩 보고 있는데 주연인 알피 보의 노래는 정말 감탄스럽다. 이 정도의 가창력을 가지려면 타고난 재능 이외에도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극의 마지막은 'Do you hear the people sing(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지며 레미제라블의 대미를 장식한다. 인간 인생사의 온갖 희로애락을 2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에 이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제작진의 능력에 감탄한다. 사랑, 고통, 영광, 신념, 정의, 혁명, 후회와 용서 등 그 짧은 시간 안에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망라하고 가슴을 뒤흔들며 마지막엔 관객 전원의 기립박수를 끌어내고야 만다. 이 글을 쓰기 위해 25주년 기념 콘서트를 다시 보는데 또다시 감동이 밀려왔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다.
우리나라에 돌아오고 나서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 달 내내 우리 부부는 레미제라블의 노래를 듣고 다녔다. 지금도 노래를 들을 때마다 뭉클해진다.
여러분이 혹시 런던을 방문하신다면 웨스트엔드에서 레미제라블은 꼭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에게는 평생에 남을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