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State of Mind 2)
혼자 런던에 있을 때의 사진은 지난번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내와 다시 방문한 런던에서 사진을 꽤 남겼으니 그 사진들을 포스팅하며 런던을 소개하는 시간을 다시 가지고 싶다.
런던에 혼자 있을 때 즐겨 찾았던 내셔널 갤러리를 아내와 다시 찾으니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쁨과 그 친구를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기분이랄까.
내셔널 갤러리 안의 작품 사진을 저번 포스팅에 전혀 올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다행히도 인상 깊었던 작품 중 일부의 사진이 남아 있다. 잠시 간접적으로나마 감상하시고, 언젠가 직접 작품을 보시며 작품의 질감과 감흥을 오롯이 느끼시길 바란다. 나는 작품 사진들을 다시 바라보니 갤러리의 원목 바닥에서 풍겼던 특유의 향취가 다시 떠오른다. 인간의 기억은 이렇게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아버지의 계략으로 본의 아니게 여왕 자리에 올랐다 9일 만에 폐위된 제인 그레이.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로 알려진 메리 1세에 의해 처형당하게 되는 위의 장면에서 처연하지만 의연한 면도 보인다. 가톨릭교도인 메리 1세는 평소에 지적인 제인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국교 회의 교도인 제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처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의연히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처형한다. 부모의 학대와 권력의 암투 속에 희생된 지적인 한 여자의 운명은 명화로 남겨졌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유명한 작품들도 많고 특히 고흐의 '해바라기' 앞은 항상 관람객으로 북적이나, 대중적 인기와 상관없이 그냥 인상적인 그림 사진 몇 장만 찍고 나왔다. (물론 해바라기도 인상적이었으나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명화는 마음에 기록해야 하는 한다는 주의라서 사진이 많이 없는데, 그림의 느낌을 전달하기에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사진으로 다시 보니 여전한 감흥이 있다.
혼자 시내를 돌아다닐 땐 내셔널 갤러리를 나오면 빅벤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사우스뱅크 쪽으로 보통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하지만 이날은 일단 그림 관람으로 시장한 것 같아 아내와 차이나타운 쪽을 향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금만 가면 레스터 스퀘어가 있고, 거기서 머지않은 곳에 차이나타운이 위치해있다. 중국인들은 대단한 것 같다. 런던의 비싼 땅값에도 불구하고 가장 번화가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그들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비싼 땅값 때문인지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런던에 예전에 머물 때 친한 누님이 소개해 준 동남아 음식 전문 식당이 차이나타운 안 골목에 위치해 있다. 관광객들은 찾아가기 좀 어렵게, 잘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이다. 현지 동남아 이민자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서 아시아 음식을 먹고 싶을 때 내가 즐겨 찾던 곳이다.
허기를 달랠 겸 여기에 들러 코코넛 라이스 볶음밥과 약간 얼큰한 라이스 누들을 주문해 먹었는데, 나중에 아내는 런던에서 먹은 음식들 중 이것들이 가장 맛있었다고 회상한다. 아시아인은 역시 쌀을 먹어야 하는 건가. 푸짐한 양과 저렴한 가격, 그리고 쌀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의 식욕을 폭발시켰다. 당연히 맛도 좋았다.
보기보다 훨씬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코벤트 가든 쪽을 향했다. 런던의 장점 중 하나는 유명 관광지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이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것이다. 코벤트 가든은 각종 브랜드 숍과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 레스토랑, 각종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들로 가득한 관광지다. 쇼핑몰과 야시장의 결합이라고 할까. 소화도 시킬 겸 쇼핑의 욕구 없이 정처 없이 걸었다.
코벤트 가든 한쪽 면의 사진인데 볼 때마다 기차역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유명 셰프인 올리버가 운영하는 식당의 코벤트 가든 분점인 듯하다
코벤트 가든 한가운데 지하 광장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흥겹게 연주하는 거리의 악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의 버스킹이라 잠시 고단한 다리를 쉬며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사진 속의 비둘기는 뭐 하나 떨어진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듯하다.
각종 파이나 케이크를 팔고 있는데 하나씩은 다 맛보고 싶은 비주얼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때때로 비주얼만큼 맛있지 않은 제과류가 꽤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먹기에 너무 단 경우가 많다. 샘플을 맛볼 수 있도록 가판대 앞에 놓아두었을 땐 반드시 시식해 보시고 사시길 바란다. 그럴 땐 "Can I try this one(이것 하나 먹어 봐도 돼요)?"라고 물어보시면 된다.
코벤트 가든에 있는 골동품 가게인데 영국인들은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느 시장에 가더라도 저런 장식품, 빈티지 장난감, 골동품 등을 파는 가게는 꼭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언제 만들어진지 알 수 없는 각종 진귀한 장식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판타지 영화 속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해리 포터'도 왜 영국에서 탄생했는지 짐작이 된다. 그러고 보니 '반지의 제왕'이라든가 '나니아 연대기' 등의 판타지 고전들도 모두 영국 작가에 의해 탄생했다. 이런 예쁘고 진귀한 골동품에 대한 영국인들의 사랑과 판타지 명작들의 탄생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가진 가설이 있다. 영국은 날씨가 일 년 내내 우중충한 경우가 많다. 그다지 밖을 돌아다니며 햇볕을 즐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특히 겨울이 오면 해가 굉장히 일찍 진다. 빠를 땐 오후 4시 정도에 해가 진다. 그래서 긴긴 겨울밤을 갖가지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겨울이 아니라도 밖에 돌아다니기엔 우울한 날씨에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다.
공포소설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도 영국에서 탄생했고 추리소설의 고전인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시리즈,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들을 생각해 보면 영국의 음습하고 우울한 날씨와도 잘 어울린다. 날씨가 주는 환경적 약점을 영국인들은 훌륭한 상상력으로 멋지게 극복한 듯 보인다. 영국의 흐린 날씨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우스 뱅크에 있는 어느 골목의 전시물 - 영국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은근히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