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만난 얼굴과 대직약굴(大直若屈)
○ 정상에서 만난 얼굴과 대직약굴(大直若屈)
부천에 살던 처형이 목포로 이사를 갔습니다. 2019년 여름 휴가기간에 목포에 다녀왔습니다. 오전 여섯 시 반, 아파트 주변을 산책할까 하다가 무더위 때문에 포기했던 유달산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평탄한 한 시간 코스로 정했습니다. 초입에 있는 노적봉으로 갔습니다.
“앞바다에 왜선이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자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가 산처럼 쌓인 것처럼 위장하였다고 한다.”
노적봉보다 제 눈길을 끈 것은 낮은 자리에 웅크린 작은 기념비였습니다. 5.18. 항쟁 당시 노적봉은 목포 MBC가 있던 곳이었는데 광주의 참상을 알리다가 1980년 5월 21일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충무공의 애국과 시민의 민주의식은 다 같이 소중한 마음인데 목포 MBC가 있던 곳의 표식은 초라해 보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돌계단을 오릅니다. 볕이 따갑습니다. 장군의 동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삼학도와 일본인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대학루, 신선이 춤추는 달선각과 유선각, 정오를 알려주는 포를 쏘던 오포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가사를 새긴 눈물비까지 지나니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난간과 계단이 완비되어 오르기 나쁘지 않은 길이지만 천천히 풍경을 감상하며 머무르기에는 너무 무더운 날씨입니다. 그래도 일등 바위 정상에 오르니 힘든 순간은 다 증발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올라옵니다. 대구에서 온 아저씨(1)는 1970년대에 목포에 와 보고 40년 만에 처음 왔다고 합니다. 무안 아저씨(2)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일 년을 빠짐없이 매일 유달산 정상에 오른다고 합니다. 목포 아저씨(3)는 암벽등반을 하는 분인데, 사진에도 취미가 있으셔서 이 날만은 암벽을 타고 제주로 떠나는 페리호를 찍겠다고 합니다. 무안(2)이 오전 9시에 배가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말랍니다.
▶ 그분들(비전향 장기수) 말씀이 해방 전후 격동기에 선배들한테 물려받은 원칙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43쪽)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당신에게 뜬금없이 유달산 얘기를 꺼낸 것은 위 문장을 보고 떠오른 얼굴 때문입니다. 목포가 정치적인 고향인 故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여 2013년 6월 개관한 김대중 평화기념관이 목포에 있습니다. 그 또한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분이기도 하고 감옥에서 껌, 종이, 과자 포장지에 못으로 깨알같이 글을 눌러썼다는 점에서도 당신과 닮았지요.
그는 수많은 어록을 남겼습니다.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정에서 최종 형이 선고되는 순간, 나는 판사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형이고, 둥글게 튀어나오면 무기였어요. 살고 싶었어요. 옆으로 찢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요.”주7)
그 중에 “어느 분야서나 성공하려면 서생과 같이 양발을 원칙 위에 확고하게 딛고, 상인과 같이 양손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두 가지 조화 있는 발전을 기해야 한다.”주8) 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원칙주의자들은 변절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실용주의자들은 실상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공론이라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진영이나 인물에 대한 좋고 싫음을 떠나 한 개인에게 현실 속에서 이상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근본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제 생각만 고집하지 않고 토론과 설득, 이해와 공감의 그물로 물질을 멈추는 않는 유연한 소신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대직약굴(大直若屈), ‘최고의 곧음은 마치 굽은 것 같다’는 노자의 말씀처럼.
- 별들이 금니처럼 반짝이는 처서에
주7)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메디치미디어, 2017, 252쪽
주8) 최성 엮음, 《배움》(김대중 잠언집), 다산책방,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