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리 리드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을 읽고)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2018, 130쪽)
■ 합천과 부천
소설은 빅토리아가 저수지 아래 잠긴 고향 ‘아이올라(Iola)’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합천’을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아버지는 오일장에서 그릇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선을 보러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온돌방에서 서로를 처음 마주했다. 세 번 데이트를 하고 날을 잡은 뒤 전통혼례를 올렸다. 부산에 신혼살림을 차린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경남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댐이 생겼다. 인근 마을이 소설 속 아이올라, 사피네로, 세볼라처럼 물에 잠겼다. 밤나무골에는 안개가 늘었고 담수호 인근에 낚시꾼이 몰려들었다. 막 준공된 합천댐 기념전시관에 놀러가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셋째 이모는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합천 읍내에 목욕탕을 인수받았다. 댐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따라 조성된 수변공원 앞이었다. 독재자의 호(號)로 불리는 공원 내 인조 잔디 구장에서 매년 유소년 축구대회가 열린다. 어느 날 이모가 고지서를 내게 보여준 적 있다. 네팔에서 온 세신사가 비자기간 만료로 체류허가 기간이 끝나 곧 불법체류자가 된다고 통보서였다. 새벽 네 시 어김없이 욕탕 밸브를 올리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댐이 수문을 열 듯 탕 안으로 물이 콸콸 쏟아지고, 부표처럼 떠 있는 축구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 펼쳐졌다.
한편 부천은 내게 특별한 도시다. 첫 직장을 얻은 곳이고, 지금의 아내를 만났으며 첫 아이를 낳은 곳이다. 부천의 공원에는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한다. 복숭아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는 ‘복사골’이나 ‘도화(桃花)’ 같은 이름이 붙은 장소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꽃향기가 흩날리는 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소설 속 빅토리아의 아들 ‘베이비 블루’의 양부모처럼 한나절을 보내던 기억이 내 가슴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다. 탐스러운 복숭아와 카누처럼 길쭉한 이파리가 겉표지에 그려진 셸리 리드의 소설『흐르는 강물처럼』(이하 페이지만 표시)을 읽었다. 얼개는 대략 이렇다. 미국 서부 콜로라도 주 ‘아이올라’, 복숭아를 재배하는 내시 가(家)의 딸 ‘토리’(어린 시절 ‘빅토리아’의 애칭)는 마을을 찾은 이방인 ‘윌슨 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돌연히 윌슨은 실종되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윌슨의 아이를 갖게 된 빅토리아는 출산을 위해 가출을 결심하고 사랑을 나누던 산막에서 홀로 아이를 낳는다. 빅토리아는 공터에 소풍 온 가족의 자동차 뒷좌석에 아들을 눕히고 도망친다. 이후 아이올라는 댐 건설로 물에 잠기고, 빅토리아는 농장의 복숭아나무를 이식하기로 결심한다. 수년 간 노력 끝에 과수원을 다시 일구어 낸 빅토리아는 아들의 새엄마가 남긴 쪽지 뭉치를 발견한 뒤 마침내 아들과 재회하게 된다.
한 여성의 유년 시절(17세)부터 중년(40세)까지 흐르는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 징검돌이 필요했다. 제4부에서 힌트를 얻었다. 제4부(1949년-1970년)는 양모 ‘잉가 테이트’가 빅토리아의 아들을 발견한 공터 바위 위에 놓아 둔 쪽지의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빅토리아에게 쓴 편지라기보다 일기에 가까운 문장이다. “새, 복숭아, 산책, 손, 나무, 튀기, 돌멩이, 여자 친구, 생일, 진실, 기다림, 전쟁, 뉴스, 말, 비행, 어머니”. 여기서 젠더와 인종, 회복 탄력성, 모성과 신성, 계승과 선택 같은 단어를 뽑아낼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풍부한 묘사와 매끄러운 번역 또한 이 소설의 장점이다. 한 여성의 성장 서사로 읽어도 좋고 젠더와 인종, 모성과 자연의 회복력, 종교적 관점 등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여러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