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로 시작해서 친구로 끝난 우리들
기묘한 인연이다. 작은 방 한편에서 귀여운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는 우리. 상 한가운데 모여 앉은 여자 넷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과 서로를 보는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더니 양볼을 잔뜩 부풀리다 있는 힘껏 숨을 내뱉어 촛불을 껐다.
"모두 퇴사 축하합니다!"
연기의 그스름이 허공을 떠돌다 사라졌다. 퇴사는 슬픔과 실패의 단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함께 모인 동기들 덕분에 '퇴사'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말처럼 들린다. 케이크에 레터링 된 문구처럼 우리 넷은 어제 마지막 한 명을 끝으로 모두 같은 회사를 퇴사했다. 그것도 삼 개월 만에.
나이도, 사는 곳도, 직업도 모두 다른 4명의 여자는 입사시기조차 달라 함께 있던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원수가 가도 한 번쯤은 말릴 회사'에서 겪었던 수많은 썰들과 업무 과로로 인하여 생겨난 동지애가 자연스럽게 서로를 엮었다.
나는 우리들 중에서 두 번째로 입사했던 직원으로 직종을 변경해 간 첫 회사였다. 원래 에디터라는 직업을 꿈으로만 간직하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향해서 도전을 해보고 싶어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해 옮겨갔던 곳이었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편리한 접근성과 전망 높아 보이는 회사의 이념. 회사 평점도 다른 곳에 비해 나쁘지 않아 바로 원서를 접수했다.
서류를 넣자마자 얼마 안 있어 면접 일정이 잡혔고, 수월하게도 합격이 되어 일주일 만에 나는 입사를 했다. 출근 첫날, 안내를 해주는 인사팀이 있는 것도 좋았고, 고층 빌딩 안에서 깨끗하고 세련된 사무실을 쓰는 것도 썩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부푼 마음을 안고, 섣부르게 의지를 다졌다.
'내 꿈의 시작이니깐, 이번에는 정말 잘해보는 거야!'
열정 가득한 신입사원처럼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머쓱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맞은편 동그란 여자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모니터 아래에는 약봉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보통은 간식이나 사무용품이 먼저 보이지 않나? 마치 시간에 쫓기듯 다급해 보이는 두 손과 눈동자를 보며, 나는 그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퇴사자 2인 동동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동동님은 나보다 2주 정도 먼저 입사한 에디터로,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는 같은 나이로 굉장히 동안인 직원이었다. 나와 동동님은 콘텐츠 마케터 분과 셋이 묶여 거의 한 파트처럼 붙어지네기도 했고 또 나중에는 사무실 자리를 옮기고 나서 옆 짝꿍이 되었다.
그런 동동님을 가장 가까이 지켜보면서, 나는 사람을 일로 한계까지 몰면 몸과 마음을 모두 망가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날이 갈수록 얼굴에 그늘도 보이고, 저 줄어들 생각이 없는 약봉지를 보면서 어쩌면, 나보다 퇴사가 더 필요한 건 바로 동동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뒤, 내가 한 달 반 만에 먼저 퇴사를 하고 나서 동동님도 퇴사를 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아파서 연차를 쓴 날까지 연락을 해 일을 시키는 걸 보고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나는 입사를 한 지 2주 만에 초반 열정은 깡그리 사라지고, 과도한 업무량과 수당 없는 야근이 당연시되는 곳에서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2주 차에 해보지도 않았던 업무를 어제 새로 들어온 디자이너와 함께 해보라며 던저주 었는데, 그때 그 디자이너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이 회사는 뭐지?' 싶은 같은 시그널. 2주 된 에디터와 2일 된 디자이너에게 업무 하나를 덩그러니 맡기면서 무작정 설명 없이 해보라고 하는 게 서로 이해되지 않아 헛웃음만 주고받았다.
이 디자이너는 나중에 퇴사자 3이 되는 해님으로 우린 그날 계기로 서로 밥 한번 먹자에서, 이제는 팸 하나를 만들어 종종 보는 재밌는 사이가 되었다.
해님은 능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회사가 컨택해서 데려온 인재로 하는 일과 더불어 여러 외주도 받고, 자신만의 브랜드도 만드는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폭포수 같이 밀려드는 일과 인정보다는 직원을 깎아내리는 상사 밑에서 더 이상 함께 하는 건 힘들겠다는 생각으로 퇴사를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내 우지님. 사실 우지님은 퇴사자라고 하기보다는 계약 만료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우리들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우지님은 인턴으로 들어온 싱그러운 대학생이다. 회사에서는 몇 번 마주친 적도 없고, 점심 두세 번을 먹은 게 고작이었지만 우지님께서 내가 퇴사하는 날 아기자기한 선물과 작은 편지를 챙겨주는 마음씨에 감동해, 우리는 그 이후 급격히 친해졌다.
우연찮게도 만들어진 자리에 한 명, 한 명이 끼다 보니 이렇게 퇴사자 넷이 모여 달마다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전회사는 내가 다녔던 기업 중 가장 최악이었지만, 나에게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준 고마운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그 회사를 또 갈 것 같다. 찰나의 시간 속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니깐.
우지님까지 계약 만료가 되고 나자 우리는 해님 집에 모여 작은 축하파티를 열었다. 고작 다닌 기간은 평균 3개월 미만이지만, 그런 회사를 탈출한 것을 축하하고 또 서로 좋은 인연을 만난 것을 감사하는 파티!
행동대장인 내가 케이크도 주문하여 픽업하고, 해님께서는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주셨다. 살랑이는 노랫소리와 따뜻한 햇살. 퇴사한 여자 넷이 모여 전 회사를 욕하고 앞으로 미래를 꿈꾸며 소담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우리에게 절망과 시련을 줬던 회사지만, 현재는 서로가 남아 더 빛나는 내일을 그린다. 우리는 넷은 모두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눈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