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17일 개봉한 영화 ‘슬픔의 삼각형’(연출 루벤 외스틀룬드)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다룬 우화란 점에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선배인 ‘기생충’(연출 봉준호)이 연상된다. 영화는 쏟아내는 구토와 분뇨의 양만큼 ‘기생충’보다 노골적이다. 계급 구조를 전복시켜 한발 더 나아갔다는 느낌도 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계급이 역전돼도 달라지는 점 없이 혼란(카오스) 그 자체만 남는다는 점에서 기존 시스템에 묘하게 기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생충’이 분노와 안타까움을 품고 있다면, ‘슬픔의 삼각형’은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영화는 3부로 구성된다. 1부의 칼(해리스 디킨슨)과 야야(샬비 딘)는 모델 인플루언서 커플. 이들이 속한 패션업계에선 아름다움이 곧 권력이다. 칼은 식사 비용 계산을 두고 야야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남자가 항상 계산하는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하락세인 그에 비해 야야는 잘 나가는 모델이기도 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평등하길 원해”라는 칼의 말은 복선이 된다.
2부에서 둘은 협찬을 받아 초호화 유람선을 탄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선장(우디 해럴슨)의 유람선엔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러시아 재벌, 수류탄 사업을 벌이는 노부부 등 슈퍼 리치들이 가득하다. 이곳은 돈이 곧 권력인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 이들은 승무원에게 “워터슬라이드를 타고 수영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린다.
끊임없이 호화 요리와 샴페인을 흡입하던 승객들은 줄지어 구토하고, 거센 폭풍우에 배가 휘청거리며 부자들의 몸뚱이는 바닥에 나뒹군다.
3부에선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칼과 야야 커플, 승무원 폴라, 러시아 재벌,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던 필리핀 출신 노동자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 등의 생존기가 펼쳐진다. 유람선에서 최하층이었던 애비게일은 불을 피우고 생선을 잡을 수 있어 최상층 ‘캡틴’(지도자)이 된다.
돈이 쓸모없어진 원시사회에선 생존 능력이 곧 권력이 된다. 생선 한 조각을 더 먹으려고 그녀의 비위를 살피는 인간들의 모습은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다. 전통적인 성 역할을 부정하던 칼은 여성 권력자 애비게일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판다.
영화는 ‘기생충’처럼 공간을 통해 계급 구조를 효율적으로 드러낸다. ‘기생충’이 기택(송강호) 가족이 사는 반지하와 동익(이선균) 가족이 사는 호화 저택, 그리고 거기에 딸린 지하실로 계층을 분류했다면, 이 영화는 유람선을 통해 상류층인 돈 많은 승객, 중간층인 승무원, 하류층인 청소부 등을 구분한다.
공교롭게도 역류하는 변기가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기도 한다. 다만 ‘기생충’에선 기정(박소담)이 변기 위에 앉아 들끓음을 애써 눌렀다면, 이 영화는 변기가 역류하다 못해 폭발해 유람선을 분뇨로 잠식시킨다. 두 영화 모두 돌이 공격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반면 ‘기생충’은 끝내 계급 구조를 뒤엎지 못한 반면, ‘슬픔의 삼각형’은 계급이 전복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만 무인도에 표류했다는 가상의 상황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계층 문제에 집중한 ‘기생충’과 달리 영화는 젠더, 자본주의 대 마르크스주의, 인종 문제 등 현대사회가 가진 갖가지 문제에 손을 댄다. 곳곳에 내재된 병폐가 터지면서 만들어지는 혼란상이 웃음을 유발하지만, 다소 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본질적 차이점은 상류층에 대한 태도다. ‘기생충’의 부잣집 주인 동익은 남들이 칼에 찔려 죽든 말든 아들을 살리려고 자동차 열쇠를 달라고 소리치는 이기적 인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그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엔 날이 서 있다.
반면 ‘슬픔의 삼각형’은 무인도로 접어들며 자본주의나 현대 소비주의의 폐해에 대한 신랄했던 시선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이 영화로 세계에서 9명뿐인 황금종려상 2회 수상자가 된 외스틀룬드 감독은 올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얼굴을 찌푸릴 때 미간과 코 위쪽으로 생기는 삼각형 모양의 주름을 뜻하는 미용업계 용어로, 피라미드식 계급 구조를 상징한다. 칼, 야야, 에비게일 3인의 꼭지점을 연결시키는 의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