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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시네마다"…노장의 참회록<플라워 킬링 문>

by 테토아부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오늘날 주류 영화계에서 ‘시네마’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여겨진다. 그는 마블 히어로 영화가 열풍일 때 “테마파크”라고 일침을 가했고, 최근 BFI 런던영화제에서 열린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의 대담에선 “(영화와 달리) 콘텐츠는 먹고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농담조’였지만, ‘진지한’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그의 굳은 신념이 강하게 드러났다.


common - 2023-10-26T153337.176.jpg 영화가 굉장히 유장하다. 요즘 영화엔 거의 없는 장편소설 바이브.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작 ‘플라워 킬링 문’(19일 개봉)은 “잘 봐, 이게 진짜 영화다”라는 노장의 선언문 같다. 2시간 남짓을 못 견뎌 2배속으로 돌려보고, 그마저도 유튜브로 10분 요약 영상을 보는 시대에 3시간 26분이란 러닝타임만으로 이 영화는 도발적이다. 미국 서부가 배경이지만 총잡이 영웅은 없고, 연쇄살인이 있지만 미스터리도 없다.


스코세이지는 서부 개척시대에 인디언을 밟고 올라선 미국 자본주의의 민낯을 건조하게 드러내고,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미국사를 참회한다.


common - 2023-10-26T153343.055.jpg 굉장히 나쁜 놈과 나쁜 놈에게 젖어들어 나쁜 짓을 한 놈이다. 생각해보니 둘 다 나쁜 미국 백인놈들이다ㅜ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의 오클라호마. 인디언인 오세이지족은 원래 살던 땅에서 쫓겨나 척박한 오클라호마 북동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된다. 그런데 이 땅에서 석유가 터지고, 이들은 막대한 부를 얻게 된다. 끈적끈적한 석유가 인디언들의 몸을 까맣게 물들이는 오프닝 장면처럼, 돈 냄새를 맡은 백인들은 ‘홍인종’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인디언들에게 빌붙는다. 주간지 ‘뉴요커’ 출신인 작가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국내 발간 제목은 ‘플라워 문’)을 기초로 한 실화 바탕 영화다.


common - 2023-10-26T153347.316.jpg 메뉴가 뭐에요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구 페르소나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로버트 드니로가 동시에 출연한 첫 번째 영화다. 턱을 내민 채 한껏 인상을 쓰지만 속은 물렁하고 아둔한 어니스트 역의 디캐프리오와 겉은 인자하지만 속은 무자비한 삼촌 윌리엄 헤일 역의 드니로는 최선의 연기를 펼치며 스코세이지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특히 드니로는 ‘킹’이라 불리는 마을의 큰 어른이지만, 실상은 인디언들에게 허무함과 나태함이란 독소를 주입하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비열한 악역을 연기했다. 삼촌의 지시로 유산을 노리고 접근한 어니스트와 결혼한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 역의 릴리 글래드스톤이 극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두 수다쟁이 남자 사이에서 줄곧 침묵을 지키는 몰리의 슬픈 눈은 여운이 길다.


common - 2023-10-26T153352.971.jpg 제시 플레먼스가 뭘 해볼 수도 없게 다 짜여져 있더라. FBI 태동은 책으로 보자.


보드빌 극장으로 돌아가 영화 속 영화 느낌을 주는 영화의 엔딩은 파격적이다. 보드빌은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인기를 끈 버라이어티쇼로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요즘에야 전통적인 영화 지킴이로 여겨지지만, 사실 스코세이지 감독은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영화 미학을 개척해 나간 비주류에 가깝다. 미국사를 되짚은 이 영화의 마지막을 영화의 효시였던 보드빌로 마무리하는 엔딩은 침체된 영화의 다음 길을 묻는 노장의 고통스러운 질문 같다. 그가 직접 변사로 나와 고발하는 듯한 장면은 그래서 더 울림을 준디.


common - 2023-10-26T153401.689.jpg 인디언 아낙네들의 수다씬


제목인 ‘플라워 킬링 문’은 인디언들의 몰락과 이들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백인들을 은유하는 말이다. 5월에 핀 키 큰 꽃들이 빛과 물을 독차지해 4월에 피었던 꽃들은 생명력을 잃고 땅에 묻힌다. 그래서 오세이지족은 5월을 ‘꽃을 죽이는 달(플라워 킬링 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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