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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토아부지 Oct 26. 2023

‘데이비드 핀처식 오마카세’…영화 <더 킬러>

서러워서 올리는 리뷰 - 서올리


영화 ‘더 킬러’(25일 개봉·넷플릭스 11월 10일 공개)는 “내가 이렇게 지루한 일을 할 줄 몰랐다”는 ‘킬러’(마이클 패스벤더)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표적이 올 때까지 킬러는 몇 날 며칠을 기다리며 요가를 하거나 책을 읽고 근처 상점에서 간단히 장도 본다. 킬러의 권태로운 일상이 반복되며 지루한 영화인가 오해할 즈음, ‘헉’하는 순간과 함께 영화는 급변하며 속도를 높인다.


킬러는 표적을 기다리며 도를 닦는다. 방망이 깎는 노인 같기도 하다.


현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인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지루한 순간을 못 참는 넷플릭스 스타일을 충족시키면서, 명암과 사운드의 활용으로 고전 누아르 영화의 풍미를 담아낸다. 역동적 액션과 쫀쫀한 긴장감을 가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이자 품격을 갖춘 시네마이다. 빠른 호흡에 익숙한 대중과 진지한 영화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 같다.


 

굉장히 폼나는데 프로의 고달픔이란 게 있다.


냉철한 완벽주의자인 킬러는 매 순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자신의 임무 실패로 사랑하는 사람이 보복당하자 그는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는 ‘변호사’를 찾아가 상황을 파악하고, 그를 통해 가족을 공격한 ‘야수’와 ‘전문가’의 소재를 알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돈을 주고 이 일을 시킨 ‘의뢰인’을 찾아야 한다. 완벽히 복수하지 않으면, 자신이 당하기 때문이다.


고달프다고 했지.


킬러가 표적을 놓치고, 가족이 보복을 당하자 이를 위해 복수한다는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뻔하다. 그런데 핀처 감독의 연출력과 고독한 킬러역에 딱인 패스벤더의 호연은 차린 게 없는 반찬 같은 단순한 이야기를 영화적 즐거움이 가득한 진수성찬으로 바꿔놓았다. 감독은 킬러의 여정에 따라 구분된 각 챕터(‘은신처’-‘변호사’-‘야수’-‘전문가’-‘의뢰인’)를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요리하며 ‘핀처식 오마카세’를 선보인다. ‘변호사’ 대목은 잘 짜인 스릴러 같고, ‘야수’는 격렬한 육박전이 펼쳐지는 액션물이다. ‘전문가’로 나온 틸다 스윈턴은 킬러와 만나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기나긴 수다를 통해 ‘말빨’ 하나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쪽잠자며 기다렸는데 안 풀릴 때가 있다.


킬러가 작업(암살)할 때 늘 이어폰을 착용한다는 설정은 세상과 단절됐다는 고독감과 함께 현장감을 높인다. 영화는 크게 킬러의 시점과 킬러를 보는 관객의 시점으로 나뉜다. 킬러의 시점일 땐 그가 이어폰을 착용한 상태라 음악이 크게 흘러 몰입감을 높이고, 관객의 시점일 땐 음악이 이어폰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정도로 작게 들려 관객이 현장에서 그의 작업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도 돈이 많아서 알랭 들롱보다 훨씬 처지가 낫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패스벤더는 피도 눈물도 없이 주어진 임무를 처리하는 킬러의 처지를 표상한다. 매 순간 다른 이름으로 신분을 바꾸는 그의 유일한 정체성은 ‘킬러’라는 사실이다. 고독한 킬러는 매 순간 혼자 읊조린다. 킬러로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그는 ‘계획한 대로 하라’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말라’ ‘아무도 믿지 말라’는 자신의 개똥철학을 성공의 3대 원칙인 양 반복해 관객에게 설파한다. 어찌 보면 ‘이 남자가 사는 법’이란 블랙코미디 같다.


이거 재밌더라. 팽팽함.


킬러가 자신의 표적을 놓치고, 위기에 빠진다는 설정은 프랑스 고전 영화 장 피에르 멜빌의 ‘고독’을 연상시킨다. 킬러가 사랑하는 대상의 복수를 위해 나선다는 설정은 ‘존 윅’이 연상된다. 영화의 액션이 워낙 사실적이라 사실적인 액션을 표방했다는 ‘존 윅’의 키아누 리브스는 머쓱할 수 있다.


포스터 색감이 제일 밝아서 좋아보여.


분명 재미있지만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킬러의 여정이 나열되다 보니 기승전결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영화의 서사는 게임의 도장깨기와 유사하다. 또 주인공의 심리 변화가 워낙 없어 건조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모든 일에 철두철미한 킬러의 모습은 핀처 감독 자신일지 모른다. 그는 자연스러운 장면을 위해 수십 번, 수백 번 찍는 걸 예사로 여기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완벽주의자이다. “전념하라. 그래야 성공한다”는 킬러의 가르침이 신빙성을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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