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0년을 건너온 소크라테스의 뼈아픈 캐물음
일흔의 나이, 소크라테스는 기소된 몸으로 관아를 서성인다.
자기 아버지를 고소하러 온 에우티프론이 그를 발견하며 묻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소크라테스 님?"
한 사람은 기소를 당해 불려 온 참이고, 한 사람은 혈육을 고소하러 온 처지다. 힘센 자나 우격다짐을 일삼는 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 서로 다른 잣대로 다투는 혼란 속에서 두 사람의 엇갈린 만남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당시 정치인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며 마치 어머니에게 이르듯이 그를 고발했다. 훌륭한 농부가 어린 식물들을 돌보듯, 사회의 어린 싹들을 병들게 하는 소크라테스를 먼저 제거하려 한 것이다. 예로부터 믿어 온 신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낸다는 죄목도 더해졌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길 위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지금의 대치동 일타 강사 격인 소피스트들이 변론술과 수사학을 가르치며 군함 두 척 값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업료를 챙길 때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끊임없이 캐물으며 그들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도왔다. '누군가가 나한테서 듣고자 한다면 돈을 써 가면서까지 기꺼이 그럴 것이오'라는 그의 하소연에는 앎을 돈으로 사고파는 시대에 대한 씁쓸함이 배어 있다.
관아 앞에서의 대화는 곧 에우티프론의 송사로 옮겨간다. 에우티프론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하는 길이었다. 집안의 머슴이 술에 취해 다른 하인을 베어 죽이자, 아버지는 그 머슴을 결박해 도랑에 던져두고 율법 해설자에게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다. 그사이 방치된 머슴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고 만 것이다. 친척들은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패륜이라 비난했지만, 에우티프론의 태도는 당당했다. 자신이 신관(神官)이기에 '경건함'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확실히 안다는 오만과 자기 확신이었다.
그 맹목적인 확신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예리한 캐물음이 시작된다. 경건함의 본질, 즉 '모든 경건한 것을 경건하게 만드는 그 특성 자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에우티프론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경건하나, 신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하다'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는 그 허점을 단숨에 파고든다. 크고 작은 것은 자로 재고, 무거운 것은 저울로 달면 그만이지만, 옳고 그름과 같은 가치의 문제는 단번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 신들조차 서로 의견이 달라 다투고 적대하지 않는가. 에우티프론이 아버지를 벌주려는 행동 역시 제우스에게는 칭찬받을지 모르나 크로노스에게는 미움받는 짓일 수 있다. 결국 똑같은 행동이 경건한 것이 되기도 하고 불경한 것이 되기도 한다는 모순에 부딪힌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사에 길이 남을 질문을 던진다.
"경건한 것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인가, 아니면 신들한테 사랑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
즉, 외부의 권위(신)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옳은 본질이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 열정적인 논증이었다.
결국 에우티프론은 논리에 막혀 얼버무리고 만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저로서는 경건함이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라며 처음의 얄팍한 신념으로 도망쳐 버린다. 대답이 궁해지자 황급히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크라테스는 '나를 내동댕이치고서는 가 버리다니'라며 탄식한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찾고자 했던 것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진정한 앎과 원칙이었으나, 자기 확신에 갇힌 자에게 그 눈금은 보이지 않았다.
책장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일흔의 소크라테스가 던진 이 질문에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는가. 예전에 나는 타인을 이롭게 하는 선의라면 누구나 기꺼이 반길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나와 관계가 닿아 있지 않거나 입장이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달가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치 전쟁터에서 아군을 살리는 일이 적군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굳게 믿었던 보편적인 선조차,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잣대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나의 과거가 겹쳐졌기 때문일까. 에우티프론의 도망치는 뒷모습에서 나는 내 삶의 그림자를, 나의 얕은 지식과 자기 확신으로 빚어낸 잘못된 신념들을 날것 그대로 보았다. 자신이 옳다는 굳건한 믿음이 실은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 깨닫는 순간의 부끄러움. 에우티프론을 향했던 소크라테스의 맹렬한 캐물음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의 나를 정조준한다.
어설픈 확신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찾아온 심장의 떨림을 가만히 마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