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태함이라는 적에게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가
그 위대했던 로마 제국은 왜 쇠퇴했는가?
천 년을 호령하던 거대한 제국의 무너짐이, 왜 하필 지금 ‘나의 문제’로 뼈저리게 다가오는가. 답은 명확하다. 한때 영토를 넓히듯 치열하게 달려가던 내 삶의 뜀박질이 어느새 멈춰 섰기 때문이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체력에서는 켈트나 게르만족보다,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 로마인들’이었음에도 그들이 지중해의 패권을 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로마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로서 천 년의 세월 동안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다. 그 융성의 원인은 윤리나 정신이 아닌 법과 제도, 그리고 관용에 있었다.
그들은 점령지의 부족에게 시민권을 개방했고, 대표자를 원로원에 흡수해 사회적 통합을 이뤄냈다. 정복한 국가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거나 땅을 빼앗는 대신 오히려 땅을 배분했다. 적국 출신이라도 일정 기간 거주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로마인은 이기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나서’ 관용을 베푸는 자들이었다.
갈리아 정복 전쟁의 최선봉에 섰던 제10군단은 카이사르가 기원전 61년 스페인에서 창군한 최정예 친위부대다. 이들은 25kg의 군장을 메고 5시간 내에 36km를 주파하는 훈련을 받았다. 완전 군장으로 행군한 뒤 주둔 막사를 짓고, 다음 날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불태웠다. 훈련 시에는 군장의 무게를 두 배로 늘렸고, 보병대가 군기를 어길 경우 10명 중 1명을 제비뽑아 사형에 처하는 가혹한 규율마저 견뎌내야 했다.
문다 전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투구를 벗은 채 홀로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병사들을 몰아세우는 대신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제10군단의 실제 모습은 의외로 왜소했다. 평균 키 163cm, 열일곱에서 스무 살에 징집돼 16년간 복무한 그들은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지독한 훈련과 치열함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내게도 제10군단처럼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1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일상의 반복. 1년에 쉬는 날이라고는 설날과 추석 단 이틀뿐이었다. 25kg의 군장을 메고 묵묵히 행군하던 로마의 보병들처럼, 나 역시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계에 도전하듯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렇다면 이토록 강인했던 로마 제국은 왜 쇠퇴했는가. 다양성과 개방성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붕괴했다. 406년, 이탈리아를 침공한 동고트족을 막아 로마를 구한 반달족 출신의 스틸리코 총사령관은 야만족이라는 이유로 황실의 음모에 휘말려 처형당했다. 카이사르의 긍지였던 제10군단 역시 영원하지 못했다. 후사금에 취한 병사들은 허영심에 빠져 금반지를 끼고 사치를 일삼으며 나태해졌다. 힘든 군 생활을 감내할 수도, 응당 바쳐야 할 복종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군기가 흐트러졌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나의 맹렬했던 행군을 멈춰 세운 것은 예상치 못한 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전 세계적인 시스템과 함께 일하는 속도와 시간도 멈춰 버렸다. 강제된 멈춤으로 시작된 시간은 어느덧 7년이라는 긴 세월로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책에 파묻혀 내면을 다졌다. 하지만 물리적 행동의 제한은 점차 내 삶의 리듬마저 바꿔놓았다. 사유의 깊이는 더해졌을지 모르나, 어느새 나는 뜀박질을 멈추고 천천히 걷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걷기와 뛰기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나태함의 대가로 성장의 동력은 서서히 식어갔다.
지난 7년, 책장 속에 파묻혔던 그 고요한 시간이 결코 허송세월만은 아니었다. 무질서하게 달리기만 했던 발걸음을 가다듬고, 더 무거운 군장을 견뎌낼 내면의 근육을 키우는 ‘지독한 재무장’의 시간이었다. 이제 사유라는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은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뛰기 시작한다.
책장을 넘기며 상념에 젖어 있던 중, 한 문장이 멈춰 있던 내 심장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병사들이여! 나는 입으로서가 아니라, 이 팔로 제군들이 나를 따라오게 해 보이겠다. 나에게 명령뿐만 아니라 모범을 보여 달라고 말하라. (…) 승전의 면목을 세운 것도 바로 이 팔이다.’
삼니움인을 격퇴한 발레리우스 장군의 외침이다. 입이 아닌 행동으로, 명령이 아닌 모범으로 증명해 낸 노장군의 늠름함이 활자를 뚫고 나와 가슴에 꽂힌다. 사유와 성찰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땀 흘려 행동하기를 주저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이 뛰었을 때 로마는 번성했고, 그들이 걸었을 때 로마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제 생각의 안락한 요새에서 벗어나, 거친 호흡을 내쉬며 다시 움직여야 할 때다. 황야 위를 걸어가는 제10군단 병사를 상상해 본다. 그가 짊어진 군장의 무게는 내 삶의 무게와 같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그 왜소하지만 단단한 발걸음을 조용히 깨워 재촉해 본다. 나는 그 병사와 함께 나태함이라는 가장 무거운 군장을 메고 험난한 사유의 전장을 넘어설 것이다.
신발 끈을 단단히 고쳐 매고 일어서는 귓가에,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서늘한 질문 하나가 깊은 여운으로 들어온다.
“나는 지금 새로운 영토를 향해 치고 나갈 출발선인 ‘아우구스투스의 경계선’ 앞에 당당히 서 있는가. 아니면 나태함이라는 적에게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