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 위에 새긴 생(生)의 찬가

: 전쟁 같은 평화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무늬들

by 달빛


적의 숨을 끊어야만 내가 숨 쉴 수 있는 곳, 전쟁터다. 내가 죽이지 못하면 곧 소멸하는 절박함이 머문다.


차가운 금속음이 지배하는 그 아수라장에서 빛을 뿜는 존재는 바로 전사들이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단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내던지며 그 사지로 뛰어들었다.


적에게 맞서는 전사를 찬란하게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각종 무구들이다. 머리를 감싸는 번쩍이는 투구, 예리하게 번뜩이는 칼, 청동의 굳센 창... 그러나 그 무엇보다 압권은 '방패'다. 투구와 칼이 공격적인 욕망의 표상이라면, 방패는 전사의 영혼을 감싸는 마지막 성벽이자 그가 지켜내야 할 세계의 요약본이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우스를 위해 벼려낸 이 방패에는 <일리아스>가 숨겨두었던 세계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이 거대한 방패의 단면 위에는 붉은 선혈이 튀는 전쟁과 황금빛 밀이 익어가는 일상이 겹겹의 띠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전쟁으로 얼룩진 전사의 숙명과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이 한 면에 뒤엉켜 있음을 서늘하게 일깨워준다.


방패의 중앙에는 땅과 하늘, 바다와 태양, 달과 별 등의 우주가 자리한다. 그 바깥으로는 두 개의 도성이 감싼다. 하나는 평화가 깨져 전쟁터가 된 도성이다. 침입한 사자들에게 저항하며 개들과 목동이 사투를 벌이는 들판의 풍경이다. 다른 하나는 풍요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전사들이 두고 온 고향이자,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가 회복해야 할 삶의 터전이다. 그곳에서는 음악에 맞춰 처녀와 총각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춤추는 총각들의 허리춤에는 차갑게 식은 칼날이 번뜩인다. 즐거운 축제조차 언제든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시퍼런 운명의 복선이다. 그들이 떠나면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남겨질 처녀들 또한 넋을 놓고 격정적으로 춤을 춘다. 이 눈부시게 위태로운 청춘의 풍경 끝으로, 세상의 경계인 오케아노스 강이 둥글게 흐르며 방패의 테두리를 마감한다. 마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거대한 원(圓)처럼 말이다.


"축제가 축제만은 아니며, 평화가 평화만은 아니다."


훗날 죽음을 맞이한 아킬레우스는 《오뒷세이아》의 무대인 지하 세계에서 망령들을 통치하는 강력한 왕이 되어 있었다. "죽었다고 너무 애통해하지 마시오." 그를 찾아온 오뒷세우스가 위로하자,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답한다. "나에게 죽음에 관해 위로하려 하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뒷세우스여. 땅 위에 살 수만 있다면 난 다른 사람의 머슴으로 품을 팔아도 좋소! 농토도 없고 살림살이도 변변치 않은 가난한 사람 밑이라도 좋소! 소멸하여 죽은 모든 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보다, 차라리 살아있는 미천한 자가 되는 게 더 좋소."


찬란한 영광을 뒤로하고 어둠 속에 유폐된 영웅의 이 고백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부르는 가장 뜨거운 생(生)의 찬가다. 삶에 대해 이보다 더 처절하고도 절실한 예찬이 또 있을까?


전쟁 같은 일상과 축제 같은 평화가 이 방패 위에 함께 놓여 있다. 당신은 오늘, 이 방패 위에 어떤 무늬를 새기며 춤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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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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