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스한 봄볕 아래, 복사꽃이 와르르 쏟아지던 날의 기억
봄 햇살 가득한 시골 흙벽집 뜰 안으로 기억이 들어선다.
할머니는 집 앞 밭에서 갓 캐낸 달래와 냉이로 향긋한 전을 부치시고, 된장찌개도 정성껏 끓이신다. 부침개 익어가는 소리가 봄의 왈츠처럼 울려 퍼지고,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할머니, 학교 다녀왔어요."
"배고프지? 얼른 손 씻어라."
햇살 좋은 뜰에 밥상을 차려 주신다. 그리고 손녀는 밥을 먹으면서 조잘조잘 궁금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할머니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들어주신다.
그 시절의 따스한 봄볕 같은 추억에 잠겨 있을 무렵, 경쾌한 목소리가 나를 현실의 봄날로 훌쩍 데려온다.
"언니, 복사꽃이 너무 예뻐!"
가지마다 연분홍 팝콘을 터뜨려 놓은 듯 흐드러진 복사꽃 곁에서, 동생은 일만 하는 언니를 봄꽃이 언제 피는지도 모른다며 부른다. 초밥에 과일과 식혜까지 준비해서 그야말로 소풍이다. 빈손으로 따라간 나는 조카들에게 맛난 식사의 값을,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치르고자 한다.
"이모가 북텔러 도전 중인데 이모 도와줄 사람, 여기 붙어라."
내가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참새 떼처럼 짹짹거리며 하나, 둘, 셋 내 곁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과정을 즐겨라, 들어봤지!"
"네."
"어떻게 즐기는지, 책 이야기 들어 볼래?"
나를 향해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마주하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나는 북텔러다.' 책 속의 멈춰진 활자를 생생한 풍경으로 바꾸어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사람. 나는 조카들의 손을 잡고, 우리가 앉아 있는 이 평화로운 연분홍빛 복사꽃 그늘에서 아주 멀고 낯선 숲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자, 눈을 감고 인도 쿠마온의 거친 정글 숲을 상상해 봐. 거기, ‘짐 코벳’이라는 전설적인 사냥꾼이 살고 있었단다."
짐은 우체국장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숲과 야생동물에 푹 빠져 있었지. 새 한 마리, 동물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두 알아보곤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정글 속 식인 호랑이와 표범이 마을을 덮쳐 많은 사람을 해치고 있었다는 거야. 군대와 수많은 사냥꾼이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지.
그때, 짐 코벳은 달랐어. 혼자서 식인 호랑이를 찾아내 사살했단다. 그는 단순한 사냥꾼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환경운동가였어. 필요하지 않은 맹수는 죽이지 않았고, 국립공원을 세워 벵골 호랑이와 야생동물을 보호했단다. 심지어 사냥으로 받은 현상금 대부분을 희생자 가족에게 돌려주었어.
4월, 히말라야 발치 밀림 속에서 짐은 동료와 함께 걸었어. 숲은 온통 초록빛 융단으로 깔려 있었고, 넝쿨과 꽃이 만발해 있었지. 나비들이 꽃 사이를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달콤한 풀꽃 향기가 공기 가득 퍼졌어.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을 따라 걷는 동안, 짐은 마치 꿈속을 걷는 것처럼 황홀했단다.
짐이 동료에게 물었지.
“여정이 즐거웠나요?”
동료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어.
“아뇨, 전혀 즐겁지 않았어요. 길은 험하고 힘들었어요.”
길이 끊겨 넝쿨을 잘라야 하고, 진흙탕을 밟아야 하고, 오르막길에 숨이 차올라 마음이 조급해지는 상황 속에서, 숲의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는 전혀 없었던 거야. 그에게 길은 끝없는 초록 감옥이었고, 불안과 고통만 남았던 거지.
조카들은 짐 코벳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마음속 숲과 봄날을 떠올린다.
“이모, 오늘 복사꽃이 저를 보며 핑크빛 수줍음으로 윙크하는데요.”
“저는요, 노오란 나비가 같이 놀자고 나풀나풀 손짓하는데요.”
“저는요, 여기가 너른 봄을 담은 한 편의 동화 같아요.”
조카들의 맑은 대답은 화사한 꽃내음처럼 퍼져, 숲 속의 작은 행복들을 눈앞에서 느끼듯이 하루를 행복으로 채운다.
복사꽃이 흐드러진 뜰아래, 조카들은 서로 몸을 기울이며 마음속 꿈을 하나씩 이야기한다. 카페 사장이 되고 싶다, 경찰이 되고 싶다,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다. 나는 그 과정의 마디마디가 얼마나 즐거울지 물어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한 모퉁이를 채워준다.
할머니 산소는 집 앞 밭에 모셔져 있다. 달래와 냉이는 여전히 봄나물임을 자랑한다. 파릇하게 돋아난 잔디 위에 가만히 몸을 뉜다. 갓 자아낸 햇솜 이불처럼, 어린 시절 내어주셨던 할머니 품처럼 포근하다.
다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재잘거리던 손녀가 되어, 나직하게 말을 건넨다.
“할머니, 오늘 제 이야기에는 어떤 미소를 지어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