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지라는 돛이 전복되기 전, 나를 살리는 시스템의 힘
내일이란, ‘그 언젠가’라는 이름의 유령이었다.
죽기 전까지 끝내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할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습관처럼 내일로 미루기를 택했다. 내일은 모레가 되었고, 모레는 다시 글피가 되더니 결국 미지의 영역으로 흩어져 버렸다. 어느새 오늘 할 일은 썰물에 밀려난 조약돌처럼, 내일이라는 바다 너머로 속절없이 떠내려갔다. 나는 그것이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붙잡지 못했다.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35년 전 학교에서였다. 어린 시절, 라디오 속 가수가 진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게 컴퓨터는 또 다른 신비였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화면 위로 글자가 맺히는 모습은 마치 밤하늘에 별이 박히는 것처럼 생경한 마법이었다. 20년 전 처음 컴퓨터를 샀을 때도, 나는 단지 그 기계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표는 늘 양보의 자리로 밀려났고, 배우겠다는 다짐은 먼지 쌓인 희망으로만 남았다.
"나도 컴퓨터 하는 거 좋아하는데…."
어느새 남편과 아이들은 컴퓨터를 친구처럼 친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자리 잡았다. 열망은 있었으나, 삶을 움직일 간절함이 부족했다.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노트북을 샀을 때, 바탕화면에 점점이 박힌 아이콘들은 마치 밤바다 위를 항해하는 등대처럼 반짝였다. 20대 시절의 꿈이 아들의 노트북 위에서 아련한 빛을 내고 있었지만, 욕심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뇌과학에서는 ‘좋아하는 것’보다 ‘원하는 것’에 더 많은 신경회로가 반응한다고 한다. 그 차이는 무려 10 대 100에 달한다. 행동을 재촉하는 것은 막연한 선호가 아니라 선명한 갈망이다. 나는 그저 물가를 서성였을 뿐, 타 들어가는 갈증으로 우물을 파지는 않았던 셈이다.
이후 대학생이 된 아들이 가져온 스마트폰은 내게 손안에 가둔 우주와 같았다. 2년 뒤 그것이 한국에 출시되었을 때, 나는 누구보다 먼저 그 우주를 손에 쥐었다. 간절한 갈증이 비로소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2020년, 다시 시작된 컴퓨터 도전에서 나는 또다시 나약한 의지에 발목을 잡혔다. 문득 미국의 안전벨트 의무화 사례를 떠올리며, 나 역시 나를 견인할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의 미룸은 실수다. 하지만 두 번은 습관의 시작이다. 두 번이면 이미 기울기 시작한다. 세 번이 되면, 마음은 96도 꺾인다. 수직의 한계인 90도를 넘어서는 순간, 의지라는 배는 전복되어 차가운 바닷속으로 영영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작심삼일'이란 어쩌면 이 전복의 순간을 경고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지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지만, 환경은 그 불을 감싸 안는 등불의 유리 갓이다. 인내와 열정은 규율 잡힌 사람이 아니라, 규율 잡힌 ‘시스템’에서 더 잘 발휘된다. 나는 더 이상 의지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대신, 강물에 몸을 실어 흘러가듯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흐름에 나를 던지기로 했다.
마침내 2021년 12월 31일, 나는 컴퓨터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의 오랜 유령이었던 '그 언젠가는'은, 그해의 마지막 노을과 함께 마침내 찬란한 현실이 되어 내 곁에 내려앉았다.
내일은 더 이상 미루는 날이 아니다. 어제의 성취를 기쁘게 들어 올리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