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닫히는 문틈 사이로 발을 넣으며
가르치지 않기로 한 것은 아닐까.
요즘은 누군가를 바로잡는 일이 먼저 간섭으로 오해받기에, 많은 이가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다. 그는 글쓰기를 한 학기만 했을 뿐인데, 마지막 글은 놀라웠다.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며, 마치 강물이 한 줄기로 흘러가는 듯했다.
이렇게 빠르게 글쓰기가 성장한 이유가 궁금하다. 글제마다 숙제를 하며 매번 다르게 써내면서 근력이 키워진 것일까, 아니면 댓글의 힘일까? 어쩌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 글쓰기는 자신을 기준으로 쓰지만 댓글은 상대를 기준으로 쓴다. 나의 글이 '씨줄'이라면 타인의 댓글은 '날줄'이다. 혼자서는 그저 한 가닥 실일 뿐이지만, 타인의 시선이 교차할 때 비로소 우리는 튼튼한 옷감처럼 짜인다. 혼자 쓰는 글이 독백의 우물에 갇혀 있다면, 함께 쓰는 글은 광장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것과 같기에 그 성장이 빨랐을 것이다.
글쓰기의 비법을 묻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 질문을 했던 사람이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히 알게 되었다.
비유로 가장 적절한 게 젓가락 사용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 젓가락질로 콩자반을 집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가족이나 주변에서 굳이 왼손을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도, 나 역시 그래야 할 필요를 느낀 적도 없어서다. 처음 젓가락을 배울 때 익힌 오른손 감각만 남았을 뿐, 왼손은 연습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끄러운 콩자반을 집어 올릴 때의 그 미세한 손끝 감각,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단어와 문장을 골라내는 글쓰기의 근육이다. 안타깝게도 양손 모두 그 근육을 사용할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글쓰기도 젓가락 사용과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쓰는 분위기이면 분량에 상관없이 꾸준히 쓴다. 또한 책을 가까이한 경우가 동반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글쓰기를 배우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생각이 풍요롭다. 나는 가끔씩 일기를 썼다. 그런데 누군가가 일기장을 훔쳐보고 따져 물어서 곤욕을 치렀다. 그때부터 일기를 멈췄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글의 맥락이 뚝뚝 끊어져 매끄럽게 잇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만약 나에게도 일기가 허락되는 환경이었다면 지금쯤은 글쓰기가 강물처럼 흘렀을까. 반드시 그랬을 것이라고 우기고 싶다.
나에게 글쓰기의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보는 사람마다 관찰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마지막 학기 실습을 하면서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총망라해서 끌어 썼다. 그 과정에서 흩어진 퍼즐이 합쳐진 느낌이다. 평소의 대화에서도 상대의 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금방 인식할 수 있기도 하다. 혹은 이 사람만큼은 글쓰기를 꼭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그만'이라는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그가 닫으려는 문틈 사이로 내 발을 집어넣어서라도, 그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쉼표를 찍게 만들고 싶다.
이런 나의 심정이, 서툰 젓가락질을 하는 가족을 바라볼 때의 안타까움과 무엇이 다를까. 물론 젓가락 기능은 포크로 대신할 수 있다. 쿡 찍으면 되니까. 글쓰기 기능은 일기로 대신할 수 있다. 그냥 감정대로 쓰면 되니까. 포크는 찌르는 '결과'만 남지만, 젓가락은 집어 올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포크가 투박한 생존의 도구라면, 젓가락은 섬세한 조율의 악기 같다. 글쓰기의 깊이와 사고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 과정이 필요하다. 꼭 말해주고 싶다. 글쓰기는 젓가락질하듯이 그냥 하는 환경에서 쓰자고. 더 말하면 잔소리라서 그만하라고 마음이 다그친다.
더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은 맞을까.
편해서였는지, 두려워서였는지, 혹은 그 차이를 애써 구분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침묵이 옳았던 순간과, 끝내 말했어야 했던 순간을 나는 제대로 가려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