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꺼움이여 안녕

찬란함과 지독함 사이: 마지막 기말고사의 밤

by 달빛


속이 끓는다.

마치 3년 치의 불안을 통째로 삼킨 것처럼, 식도 끝까지 울렁거림이 차오른다.


단순히 빈속에 들이부은 차가운 카페인 때문만은 아니다. 명치끝에 묵직한 돌덩이가 걸려 내려가지 않는 기분. 이 통증은 일종의 의식儀式처럼 느껴진다. 창밖은 이미 어둑해졌고, 방 안의 공기는 건조하고 무겁게 내려앉아 나의 온몸을 짓누른다. 내 앞에는 단 하나의 시험만이 남겨져 있다. 4학년 2학기 마지막 기말고사다. 아직까지 학생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그 서늘한 사실이 나를 몰아세운다. 견딜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떨리는 손끝으로 강의 노트를 훑는다. 이번 시험의 주제는 '중재전략 개발'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철저한 지피지기의 분석이자, 어둠 속에서 여명을 찾아내는 일과 같다. 칠흑 같은 밤, 소란함을 멈추고 숨죽여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희미한 빛. 그 빛을 믿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묵묵히 내딛다 보면, 마침내 환한 아침의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활자들은 강의 노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형광펜으로 그어 둔 선명한 자국들이 마치 넘어야 할 높은 벽처럼 다가온다. 누군가의 행동을 정의하고 조건을 조작해야 한다는 그 딱딱한 개념들. 강의실에서 무심히 받아 적었던 그 건조한 언어들이, 지금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내 불안의 틈새를 파고든다.


노트 귀퉁이에 짧은 단상을 적어 넣는다. 프로그램 속의 대상자가 겪어야 할 과학적 절차가, 졸업을 앞두고 불확실한 미래의 규격에 스스로를 깎아 맞춰야 하는 나의 현재와 묘하게 포개어진다.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 나는 과연 '정상 범위'라는 좁은 합격선 안으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을까.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신경을 긁는다. 수정되어야 할 오답처럼, 튀어 오르는 나의 불안을 종이 위에 꾹꾹 눌러 가둔다.


집중이 흐트러질 때마다 나는 강의 영상을 켠다. 재생 속도는 2배속. 교수의 목소리는 우스꽝스럽게 변조되어 귓가에 꽂힌다. 정상적인 속도로는 도저히 흐르는 시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빠르게 지나가는 음성 정보들은 뇌에 닿기도 전에 하얗게 휘발되는 것 같다. 나는 그 속도감에 의지해 불안을 마취시킨다. 그때, 문장 하나가 섬광처럼 스쳐 간다.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나는 찰나에 증발하려는 그 핵심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불안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시험 범위를 반복해서 보는 것뿐이다. 나는 각 주차마다 10문제씩, 스스로 출제자가 되어 문제를 만든다. 교재의 구석구석, 각주에 달린 작은 설명까지 끄집어내어 괄호를 뚫고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듬성듬성한 그물망 사이로 정답이 빠져나갈 것만 같다. 나는 다시 추가로 5문제씩을 더 만든다. 집요한 과정이다.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시 흙을 덮고 다지는 이 행위는, 공부라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에 대한 저항에 가깝다.


시험 형식은 가혹하다. 15문항에 60분.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단순히 지식을 묻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개념을 봅니다."

고작 열다섯 문제에 한 시간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깊게 파고들라는 뜻이다. 도대체 얼마나 어렵게 비틀어서 내려는가. 차라리 짧은 시간에 단답형을 쏟아내는 시험이라면 좋으련만. 침묵과 고뇌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투명한 불안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교수님들께서는 '인공지능 시대에 발맞추어'라고 하신다. AI가 순식간에 정답을 조합해 내는 세상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겠다는 취지일 것이다. 그래서 객관식의 비중은 작고, 주관식과 서술형은 압도적으로 많다. 기계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문장'을 요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데이터를 입력받고 출력하는 기계보다 더 경직되어 있다. 시험은 창의적인 해석을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학점이라는 규격화된 틀이 나를 재단한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조종당하는 기분이다.


"개념만 익히면 쉽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는 나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펜을 쥔 떨리는 손끝 사이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심장이 강철로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누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리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질 것이 뻔하다. 머릿속에 욱여넣은 지식들은 과부하 걸린 회로 속에서 타닥거리며 새카맣게 타버릴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뇌와 생존 본능에 따라 벗어나고 싶은 육체가 격렬하게 충돌한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노트를 덮는다. 하지만 여전히 글자들이 눈앞에 잔상으로 남아 아른거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기 위해, 나는 오늘 밤새도록 '보이는 것'들에 집착했다. 이 시험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학점일까, 아니면 해방감일까. 어쩌면 그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강의실을 나서며 느낄 허무함일지도 모른다. 배움의 문을 나서는 순간, 나 또한 저 희미한 세상 속 '투명 인간 중 하나'로 흩어져 버릴까 두려운 탓이다.


아직도 속이 메슥거린다. 이것은 체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아직 이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다. 내일 답안지 위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이 두려운 감각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견뎌야 한다. 나는 다시 펜을 고쳐 잡는다.


메스꺼움이여, 안녕!

부디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 이 지독하고 찬란한 투명함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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