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定石)

가장 조용했던 사람의 가장 빛나는 순간: 사례 발표 만점자의 '정석'

by 달빛

복도에 소란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벽에 붙여 둔 발표 조 편성표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종이 한 장을 바라보는 순간, 며칠 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돌멩이 하나가 다시금 둔탁하게 명치를 눌렀다.

발표 목록을 훑다 보니 3조에서 내 이름이 걸렸다. 흐르는 강물 속에서 자갈을 고르듯 반가운 이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나정석’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낯익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앳되고 말수가 적던 청년. 갓 들어온 편입생이라 여겼는데, 어느새 같은 졸업반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와의 첫 인연은 이번 학기 팀 프로젝트였다. 열 명씩 나뉜 조에 뒤늦게 한 명이 합류한다는 공지는 올라왔지만, 첫 회의에서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조장이 어렵게 닿은 연락에 '다음에 꼭 참석하겠다'는 짧은 답장뿐. 화상 회의 속 그는 짙은 안개 너머에 이름표만 걸어 둔 사람 같았다.

그 빈자리 같던 청년이 내 짝이 되었다. 손가락을 다쳐 병원에 있었다는 그는 여리고 조용했다. 사람이 많으면 큰 목소리가 대화를 장악하는 법이다. 화려한 유화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무채색 연필 소묘처럼 앉아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다가도 오래 말린 종잇장처럼 조용히 접혀 들어가는 사람. 그는 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배경에 머무는 듯했다.

두 달 동안 그가 남긴 흔적이라곤 단톡방의 짧은 ‘한 줄 소감’뿐이었다. 그의 존재감은 풀잎 위 이슬처럼 금세 사라질 것만 같았다. 바람에 흩어질 듯한 순한 얼굴. 그저 순둥순둥한 청년으로만 그려졌다.

그런 청년이 이번엔 나와 같은 조에서 사례발표를 한다니. 잠깐,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나정석’이라는 이름은 지우다 만 연필 자국처럼 희미하게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발표 차례가 되자 그는 단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키 큰 나무가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우듯 공기가 바뀌었다. 발표 자료의 구성도 기존 틀과 달랐다. 고요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토록 대담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잎사귀처럼 바스락거렸다.

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목소리는 메마른 땅을 적시는 이슬비 같았다. 소리를 높이지 않는데도 귀를 기울이게 했다. 산사의 맑은 풍경(風磬) 소리처럼 차분함이 발표장 전체에 스며들었다. ‘제대로 준비했을까’ 하던 뾰족한 시선들이 물 밑을 들여다보듯 순하게 가라앉았다. 발표는 산길을 오르듯 차곡차곡 이어졌다. 그의 논리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잘 짜인 돌계단처럼 단단했다.

중재가 끝난 뒤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던 아이를 얇은 손끝으로 조곤조곤 어루만지는 장면. 아이의 울음이 붉은 불길이었다면, 그의 손길은 차분한 눈 같았다. 뜨거운 소란 위로 함박눈이 소복이 내려앉자, 아이의 세상은 이내 순백의 고요 속에 잠겼다. 타오르던 아우성을 그는 고요하게 덮어 잠재웠다.

그는 우리 조에서 가장 빛나는 발표자가 되었다. 큰 소리 한 번 없이, 절제와 고요만으로 최고가 되었다. 각 조 대표 발표 시간, 나정석 청년이 다시 자료를 띄우자 강의실은 먹물이 화선지에 번지듯 깊은 정적으로 물들었다. 단 한 사람의 발표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치 ‘이것이 정석(定石)이다’라고 글자가 듣는 이의 가슴에 자연스레 새겨지는 듯했다. 그의 발표는 문장 끝에 찍는 완벽한 마침표 같았다.

사례발표 만점의 전설로 불리던 선배가, 지금은 우리 학교 교수님으로 계신다. 학과장님께서 '몇십 년 만에 두 번째 만점자가 나왔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예기치 못한 찬사가 강의실 안을 붉은 단풍으로 물들였다. 발표가 끝난 뒤에도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오래도록 공기 속에 머물렀다. 가늘지만 지워지지 않는 잔향처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의 이름이 내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으려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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