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의 여정, 그리고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
존경하는 서준이 어머님께,
안녕하세요, 어머님. 어느덧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서준이와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처음 만났던 날의 막막함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시간은 바쁘게 흐르는데 서준이만 멈춰 있는 듯했고, 마치 소리가 굴절되어 잘 닿지 않는 투명한 유리 성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도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서준이는 낯선 중력을 가진 작은 행성에서 온 어린 왕자 같았습니다. 지구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그 아이만의 공전 속도를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물 위에서 흩어지는 기포처럼 닿지 못하는 제 언어를 보며 ‘도달할 수 없는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서준이를 바꾸지 말자. 그 대신 서준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서준이가 춤을 추면 저도 따라 추고, 서준이가 보는 곳을 저도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의 세계를 억지로 여는 대신 그 곁에 머물며 기다리자, 서준이는 아주 가느다란 미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틈 사이로, 서준이가 처음으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순간이었습니다.
핼러윈 램프를 가지고 놀던 날이 특별히 기억납니다. 등불을 분해하고 싶어 하는 서준이에게, 제가 무작정 해주는 대신 가위를 건네며 기다려 주었을 때였지요. 서준이는 ‘싫어요’ 카드로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고, 비록 제 손의 도움을 조금 빌리긴 했지만, 스스로 작은 손가락을 가위 고리에 끼워 열 번이나 싹둑싹둑 잘라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가위를 움직일 때마다, 딱딱한 흙을 뚫고 여린 새싹이 돋아나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습니다.
등불 뚜껑을 모자처럼 쓰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그 순간, 서준이의 눈빛이 저를 향했습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숲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처음으로 발견한 반딧불이의 불빛처럼 작지만 선명한 신호였습니다. 두 개의 세계가 비로소 하나의 온도로 맞닿은 순간이었습니다.
놀라운 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손가락 인형으로 인사를 나누고 컵 속에 도형을 정리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질서를 찾아가는 ‘꼬마 건축가’ 같았습니다.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던 서준이가, 이제는 의젓하게 의자에 앉아 과제에 집중하는 기적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흩어놓은 장난감을 스스로 정리하고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에서 아이의 내면이 단단한 옹이처럼 여물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숫자 ‘1’조차 쓰기 어려워하던 아이가, 제 손의 온기를 빌려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적고 숫자 1, 2, 3을 연이어 써 내려갔습니다. 연필을 쥔 서준이의 손은 떨렸지만, 그 떨림은 나약함이 아니었습니다. 삐뚤빼뚤한 선이었지만, 그것은 서준이가 세상이라는 땅 위에 처음으로 기둥을 세우는 웅장한 기초공사였습니다. 서준이는 참으로 강한 아이입니다. 손끝이 떨리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힘이 있는 아이입니다.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병원에서의 일화는 오랫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진료를 기다리는 20분 동안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이가 조금씩 넓혀 가는 세계가 눈앞에 고요히 드러났습니다. 지루함이라는 파도 속에서도 서준이는 마음의 닻을 단단히 내려 고요히 머무는 힘을 갖게 되었지요. 집에서 어머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책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서준이의 모습에서는, 멈춰 있던 아이의 시계가 다시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실습을 통해 어른이란 아이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서준이가 빛을 향해 걸을 때 뒤에서 조용히 지켜주는 그림자가 되어주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서준이는 이제 제 손이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두려움의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한 발 한 발, 위태롭지만 분명하게 말이죠. 마침내 서준이만의 '아침'이 밝은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어둠을 걷어내고 시작된 서준이의 하루가 얼마나 눈부시게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되고 설렙니다.
부족한 저를 믿고 지켜봐 주신 어머님, 그리고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과 행동치료사 선생님 덕분에 저 또한 서준이와 함께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활짝 웃으며 세상에 인사를 건네는 서준이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밝고 건강하게, 무엇보다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길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서준이와 함께 아침을 맞이한 동행자, 달빛 올림
*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지명은 가명이며, 일부 내용은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