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만 되풀이한 채, 이래저래 핑계만 쌓였습니다
당신의 눈을 꼭 닮은 아이가 집을 짓고 있어요.
한 줌 흙을 놓았을 뿐인데, 가슴 깊은 곳이 울컥합니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은 쿵쿵 소리를 냅니다.
“어떤 집이 좋으세요?”
말씀이 없으시네요.
큰딸이 하는 일이면 뭐든 다 좋다 하시겠지요. 그저 미소로 응답하시는 엄마. 그 미소 속에 수줍게 웃던 젊은 날의 엄마가 겹쳐집니다. 어떤 집이 어울릴지, 오래도록 고민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주방을 넓게 들일게요. 이젠 아궁이에 불 지피지 않아도 되도록 성능 좋은 전기레인지를 놓고요. 찬장 하나에 반찬과 양념을 겨우 넣느라 애쓰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요. 채소 전용 냉장고, 음식 보관용 냉장고, 그리고 김치 냉장고까지 나눠 두어, 엄마가 손쉽게 꺼내고 정리하실 수 있도록 할게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계실 엄마가, 벌써 눈에 그려집니다.
목욕은 마치 큰일을 치르듯, 날을 잡아 가마솥에 물을 끓여야 했지요. 큰아이부터 막내 다섯째까지 씻기고 나면, 엄마 차례엔 따뜻한 물도 모자라고 몸도 지치셨지요. 이제는 샤워기만 틀면 따끈한 물이 콸콸 나오고, 예쁘고 견고한 수도꼭지도 달아드릴게요. 제가 아이를 씻기듯, 엄마의 머리도 감겨드리고 얼굴도 뽀드득 닦아드릴게요.
엄마의 방은 어떻게 꾸며드릴까요. 침대에 앉으면 창밖 풍경이 그림처럼 들어오고, 봄 햇살 같은 핑크빛 이불도 펼쳐드릴게요. 엄마 옷만 정갈하게 들어갈 옷장을 들이고,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벽에 박힌 투박한 못 대신 나무 행거에 옷을 걸 수 있도록 할게요. 엄마는 분명 제게 물으시겠지요.
“어느 옷이 더 잘 어울리나?”
그러면 저는, 엄마를 닮은 작은 꽃무늬 옷을 골라드릴 거예요.
어느 따뜻한 봄날, 북촌 한옥마을에서 자전거 뒤에 인력거를 매단 이가 쌩 하고 달려가더군요.
“저거 타보고 싶다.”
제 말에 아들은 재빠르게 달려가 탈 수 있는지 물었어요. 보통은 예약해야 한다는데, 30분만 괜찮다면 10분 뒤 가능하다고 했지요. 기꺼이 올라타고 봄바람을 맞으며 달렸습니다. 그때 저는 아들에게 속삭였죠.
“다음엔 엄마의 엄마를 이 자리에 꼭 모셔야지.”
덕수궁 돌담길도 기억나요. TV에 자주 나오는 그 길. 돌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유가 다시 불러 유명해진 ‘옛사랑’을 흥얼거렸어요.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엄마의 지나온 세월이 가슴 깊이 스며들다가, 그 기억마저도 어느새 잔잔한 기쁨으로 내 안에 머물렀지요.
이른 여름, 모내기철이면 찔레꽃이 붉게 피었어요. 엄마 앞에서 손자 손녀들은 춤추고 노래했지요.
“할머니도 노래해! 할머니도 노래해!”
떼창 같은 재롱에 수줍은 웃음을 띠며,
“찔레꽃 붉게 피는~~”
낭랑하게 부르시던 그 노랫말, 지금도 바람에 실려 가슴속을 맴돕니다.
집 앞 감나무가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어릴 적, 감꽃으로 엮은 목걸이를 엄마 목에 걸어드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목걸이 하나 없는 엄마가 내심 속상하셨던 걸까요. 그러다 가을이 오면, 감이 잎사귀와 함께 붉게 물들며 익어갑니다. 쓸쓸함마저도 풍요로움으로 바뀌곤 했지요.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마주하면,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느새 웃음을 나누게 되지요.
거실에는 커다란 원목 테이블을 길게 놓을 거예요. 열 명이 둘러앉아도 팔꿈치 부딪치지 않도록, 따뜻하고 넉넉하게요. 햇살이 드는 창가엔 작은 책상도 하나 들일게요. 공책을 펼치고 글씨도 쓰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도 적을 수 있도록요. 엄마가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그 글씨를 들여다보며 저는 목젖이 다 보이도록 웃을 거예요. 글씨보다 더 정다운 건, 그 글씨 위에 머무는 엄마의 눈빛이겠지요.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사랑으로 기억되도록요.
어쩌다 보니 큰딸은 엄마의 발걸음을 붙들지 못했어요. 아들 공부시키느라 바쁘다며,
“다음에, 다음에는 꼭!”
약속만 되풀이한 채, 이래저래 핑계만 쌓였습니다.
핑계를 쌓아, 당신의 집을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