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도 낡지 않는 마음의 풍경
나의 유년의 집에는 흙담과 작은 뜰이 있었다.
그 너머, 살구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마당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풍경에 운치를 더했다. 골목에서 고무줄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 나는 소리쳤다.
“할머니! 할머니!”
그 목소리는 어쩌면, 내 편이신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신지를 확인하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는 손녀를 보며, 할머니는 ‘배가 많이 고픈가 보네!’ 짐작하셨으리라. 부엌에 있던 석유곤로를 얼른 뜰로 옮기시는 걸 보니, 김치달래전 부치려 막 반죽을 준비하고 계셨을 테다. 땅속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묵은지를 꺼내 송송 썰며, 손녀의 발소리를 기다리고 계셨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부침개 반죽이 준비되어 있을 리 없다.
할머니가 식용유를 두른 프라이팬 위로 김치와 달래를 섞은 밀가루 반죽이 제 집인 듯 스르륵 앉는다. 노릇노릇 구워진 전을 접시에 담기도 전에 젓가락으로 얼른 집어 들었다. 할머니 입에 먼저 한 입 넣어드리고는, 새로 굽는 전이 익기도 전에 모조리 먹고 말았다.
할머니의 뜰은 봄날의 달래전처럼 늘 향긋했지만, 펑펑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그 품은 언제나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날이었다. 나는 도랑에서 썰매를 타다가 손발이 꽁꽁 언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랫방 뜰에 낯선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누가 왔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여는 순간, 그곳에 반가운 동무가 앉아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 산 넘고 물 건너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고 나를 보러 달려온 동무였다.
할머니는 이미 귀한 손님을 위해 잔칫상 같은 한 상을 차려내고 계셨다. 설날이 머지않아 달여둔 조청으로 쌀강정을 만드시고, 고구마전과 식혜까지 내어놓으셨다. 특히 맷돌에 콩을 갈아 가마솥에 푹 끓여낸 뒤, 간수를 부어 정성껏 굳힌 손두부는 그날의 백미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네모 반듯한 두부를 참기름 듬뿍 넣은 양념간장에 콕 찍어 먹으면,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 속에 세상이 잠시 멈춘 듯했다.
그날, 동무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먹었다.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동무가 고맙고도 반가워, 우리는 몇 시간을 깔깔 웃으며 보냈다. 우리의 웃음은 함박눈처럼 소복소복 내려 마당에 고요히 쌓여갔다.
지금도 그 골목길은 넓히지도 못한 채 그대로다. 삽짝을 열고 들어서면 이제는 할머니의 흔적조차 사라져, 오직 기억으로만 찾아가게 된다. 흙담과 작은 뜰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너머의 살구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나뭇가지 끝에서 바람이 속삭인다.
“그때 너의 마음, 나는 알고 있어.”
할머니의 귀한 손녀는 다시 그 품에 안기고 싶다. 나의 가슴에 고이 간직한 어린 날의 풍경. 바람이 살구나무 가지를 흔들면, 나는 다시 할머니의 뜰에 조용히 앉아 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떠나도, 마음에 남은 풍경은 낡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