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2024년을 맞아 첫 책으로 이 도서를 골랐다.
문화와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며 세련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연인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 이 보고서는
일기장에 쓰인 듯 솔직하고 재치 있으면서도 심도하고 꼼꼼한 그의 성찰적인 문체로
첫 문장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나를 사로잡았다.
낭만적 운명론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격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엄청나게 작은데도 결국 일어났다면, 운명론적 설명에 호소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상화
나는 낭만적인 도취가 채울 수 있는 공허를 알고 있었다.
진정성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
사랑 때문에 나는 클로이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마르크스 주의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해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틀린 음정
모든 관계에 내포된 분열이 눈에 보이면서, 나는 익숙한 환경에 대한 원시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었다.
아름다움
나는 그녀의 영혼으로 그녀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
사랑을 말하기
내 사랑을 "ㅅ-ㅏ-ㄹ-ㅏ-ㅇ"이라는 말속에 담는 동시에 가장 진부한 연상들은 쓰레기통에 버릴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말에는 이질적인 역사가 풍부했다.
(…)
클로이의 독특함에 상응하는 고백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 상황의 세속성을 의식하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영혼에 안내자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혹시 내가 잘못된 환유를 적용하는 죄를 지은 것은 아닐까?
친밀성
경험이란 무엇일까? 예의 바른 일상을 부수고 짧은 시간 동안 고양된 감수성으로 새로움, 위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목격하는 것이다.
(…)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f)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나의 확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분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는 병적인 저항감을 느낀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늘 낙인을 찍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늘 단순한 "나"일 뿐이며, 낙인찍힌 부분들 사이를 쉽게, 다른 사람들의 선입관이 부가하는 제한 없이 이동한다.
나는 클로이가 전에 "내가 몇 년 전에 만났던 그 남자 있잖아" 하는 말을 듣고 갑자기 슬퍼진 적이 있다.
나 자신을 몇 년 후에 — 참치 샐러드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마주 보고 있을 다른 남자에게 — "내가 얼마 전에 만났던 그 건축한다던 남자 …"로 묘사하는 광경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과거의 연인에 대해서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나는 불가피하게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낭만적 테러리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또 훨씬 덜 즐거운—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
클로이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내 상처는 표현하기가 무척 힘든 것이었다. 열쇠 하고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그 문제를 꺼내면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았다.
결국 나의 분노는 지하로 밀어 넣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의미를 상징화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 상징이 해독되는 것을 반은 기대하고 반은 두려워하면서.
사랑의 교훈
나는 좀 더 복잡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의 모순들이 부응할 수 있는 교훈, 지혜에 대한 요구를 지혜가 무력해지는 상황과 조화시킬 수 있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그 불가피성과 조화시킬 수 있는 교훈.
사랑을 평가할 때에는 교조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로 달아나지 말아야 하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서 겸손을 가르쳤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확실성에 이르려고 몸부림을 쳐도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