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주의 사회에서 농담의 가치는 어떠한가.
내 농담에는 진지함이 너무 결여되어 있었는데 당시의 기쁨은 해학이나 아이러니를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가 정치적 이념을 강요할 때 개인의 삶이 ㅡ 뿐만 아니라 전통과 문화도 ㅡ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지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그리는 소설이다.
하지만 책이 오직 소련 공산당의 지배를 받던 체코의 어두운 역사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누구였던가?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 마르케타하고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냉소적이고 궤변적이었다. 그리고 혼자일 때면, (마르케타를 생각할 때면) 나는 겸허했고 중학생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3부. 루드비크)
"나는 제마네크가 미소 지으며 나를 향해 돌아서서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리자고 청하는 모습을 다시 그려 보았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 하지만 그가 용서를 빈다면 그때 나는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인가. 끔찍하게도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 그는 지나치듯 슬쩍 나를 친구라 불렀고, 나는 이제 굴욕적인 화해가 두 걸음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는 것을 확신했다. (...) 내가 복수하고자 했던 나의 과거, 그러나 여기서 마주쳤는데도 마치 나를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린 나의 과거, 그 과거 전체가 나에게 보여준 것과 동일한 그런 차가운 무관심." (7부. 루드비크, 헬레나, 야로슬라프)
500쪽이 훌쩍 넘는 내 기준 벽돌 책인데 재밌어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루치에와 재회하여 대화하는 것을 기대하긴 했지만 그랬다면 이야기가 드라마틱한 로맨스 장르가 됐겠지… 재작년쯤에 프라하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갔다면 감회가 달랐을 것 같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