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살인 당신이 현재의 당신에게...
따스한 봄볕 아래 나른한 고양이 같은 날이다. 옆으로 널찍한 둥근 반원 모양의 유리창에 가득한 5월의 파란 하늘. 푸르름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창가에 백발의 그녀가 눈을 감고 기대어 앉아 있다. 아이보리색 계량 한복 저고리에 곱게 꽃 자수가 놓인 복숭앗빛 치마를 입은 그녀의 은빛 단발머리 위로 강렬한 서쪽 태양이 새색시처럼 수줍게 부서져 내리고 있다. 가만히 내리덮은 눈꺼풀에 맘씨 좋은 까치발 주름과 옅게 자리한 하회탈 주름이 잔잔한 자동 미소를 그녀 얼굴에 새기고 있었다. 왱~왱~거리는 파리의 단조로운 날갯짓 소리가 마치 고막에 갖다 댄 확성기처럼 들리는 그때, 고요한 방 공기를 '덜컹' 흔들며 김 실장이 들어섰다.
“아~ 고문님!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강연 한 시간 남았습니다. 옷 갈아입고 준비하셔야지요.” 세계 각국에 있는 'NABI' 네트워크 교육 담당인 김 실장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눈을 떴다. 봄날 레모네이드처럼 상큼한 김 실장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먼 안드로메다에 있던 마음을 현실로 이끈다. “우리 김 실장 아니었으면 봄볕 태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뻔했네? 고마워.”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머나먼 우주를 여행하고 막 고향인 지구별에 도착한 우주인처럼 설렘 가득 감격에 찬 맑은 눈망울이다. ‘내일모레가 여든이신데, 어쩜 우리 고문님 눈은 청년보다 더 맑고 생기 있으실까?’ 부러운 듯 김 실장은 곁에서 걷고 있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고문님은 한두 명도 아닌 네 명의 따님을 모두 훌륭하게 키우시면서, 이렇게 세계적인 ‘NABI’ AI 헬스케어센터도 설립해 운영하시고... 이제는 편하게 쉬실 만도 한데 연구에, 논문에, 책도 쓰시고, 그림이며, 댄스며, 세계 여행까지... 그런데도 늘 생기있고 지치지도 않으세요. 어디서 이런 에너지가 솟아나시나요? 고문님이 혹시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신선 아닐까요? 불로초 갖고 계시면 저도 주세요, 고문님~.”
“신선?” 걷던 걸음을 그녀가 갑자기 멈춰서 복도가 떠나가게 웃었다. “불로초라...” 잠시 갸우뚱 생각하더니, “불노불사(不老不死)의 비결이 있긴 하지!” 이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사뿐사뿐 걷기 시작한다. “오~~ 고문님! 제게도 불로초의 비결을 전수해 주세요. 요즘 되는 일도 없는 거 같고, 여기저기 아프기까지 하니, 삶이 힘들고 재미없네요.” 투덜대며 힘 없이 따라오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큰 하회탈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 그녀의 곁을 살뜰히 지켜온 김 실장이라 작게라도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다. “대신 내가 알려준 것을 백일동안 매일 실천한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당연하죠, 고문님! 약속할게요.” 시들었던 풀꽃이 물을 먹고 살아나듯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야무지게 팔짱을 꼈다.
“나는 매일 밤 죽어.” “네?” 김 실장이 눈이 동그랗게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건 몰랐지? 놀리듯 그녀의 까치발 주름이 선명하게 웃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부활해.” “네~~~?” 김 실장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고문님~ 별일 아닌 일에 힘들다고 어린양 한다 저 놀리시는 거죠?” 김 실장이 살짝 애교스럽게 째려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독백하듯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돌아보면 나도 김 실장 나이대가 참 힘들었어. 뒤늦게 투자한 재테크에 모든 것이 얼기설기 묶인 데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얼어 붙어있지, 아이들은 어리지, 내 무릎에서 처리하고 해야 할 일들은 많지... 붙박이장처럼 제자리에서 차바퀴 돌 듯 살아가는 내가 어떻게 매듭을 풀고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했고, 급속하게 변하는 시기에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렵기만 했지. 누구를 믿고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할지, 다 쓴 치약을 마지막으로 짜내듯 매일 매일 덮쳐오는 뜻밖의 일들로 내가 너덜너덜 닳아져 가는 듯했어.” 그녀의 팔짱을 꼭 잡았던 김 실장의 팔이 살짝 느슨해졌다. “어머, 고문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어요?” 그녀만의 비밀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 김 실장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필요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오늘만 살자! 했어. 하루에 딱 한 가지 일만 집중하고 그날의 나는 없어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어제의 못나고 실망스럽고 지쳐있는 나는 사라지고, 에너지가 충만한 새로운 나로 눈을 뜨는 거지. 일종의 기독교 부활 의식을 내 하루 의식으로 적용한 거지. 잠자리에 들 때 처음에는, 아~ 피곤해 죽겠다. 힘들다. 부정적인 말을 내뱉더니, 점점 아~ 참 다행이었다. 감사했다. 행복했다. 기뻤다... 죽기 전 안고 가고 싶은 긍정적인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더라고.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떠 다시 새롭게 살게 된 마음에 번뜩이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생각과 계획들을 적어 내려갔지. 나는 할 수 없어. 안돼. 실현 불가능해.라는 금지선을 넘어 내가 하고 싶고 걸어가고 싶은 길로 가기 위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찾아보게 되었어.”
우아한 검은 댄스복으로 갈아입고 은발을 단정히 뒤로 묶으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춤과 글쓰기 그리고 AI에 기반한 의료지원에 대한 갈망을 찾은 것도 매일의 부활 의식을 하면서야. 내 안의 진실한 나를 만나고, 나답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에서 일상을 새롭게 관찰하고, 구체적으로 상상해가면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네.” 아담하고 자그마한 체구지만 등과 허리선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 자세에서 여든 백발인 그녀가 여전히 탄탄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김 실장도 자신만의 부활 의식을 해봐. 알을 깨고 나온 우리 안의 창조적 자아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만나게 되면 김 실장이 나를 보좌하듯 잘 살피고 대접해 주고... 이 부활 의식을 꾸준히 했던 30년 전 나를 칭찬해주고 싶어.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거니까.” 커튼이 열리고 전 세계 'NABI' AI 헬스케어센터 회원들이 접속된 가상 공간의 무대로 그녀는 은빛 나비처럼 날아갔다.
선인(僊人), 춤추듯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사람.(신선의 선인(仙人)이 갖는 원래 뜻) 무대를 향해 날아오르듯 나아가는 백발의 그녀를 바라보며 21세기 신선이 있다면 그녀일 거라 김 실장은 생각했다. 서쪽 창틀 그림자가 대기실 안을 낼름낼름 점점 더 길게 훑어가고, 창밖 파란 하늘 지평선 언저리엔 핑크 주홍빛 석양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여든 살이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제 막 반백 살이 된 나에게 그녀는 어떤 말을 들려 주고 싶을까? '여든인 나'와 '현재의 내'가 저의 첫 소설안에서 만납니다. 5월 태양의 아름다운 축복을 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