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들을
아티스트 웨이 5주차: 가능성을 되살린다.
이번 주에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동안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그어 자신의 가능성을 위축시켜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착한 척하는 데 따르는 대가가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근본적인 변화를 꿈꾸는 당신은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성장을 외면하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면 안 돼!’라는 금기는 가능성의 문을 꽉 닫아버리는 듯 보이지만, ‘부족하고 모자라다’ 는 결핍을 만들어 오히려 무의식적인 끌어당김의 욕망을 부추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신의 금기가 아담과 이브의 욕망을 부추긴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1901~1981)은 인간은 자신에게 금지되어 결핍된 것만을 욕망한다 했다. 결핍과 끊임없는 욕망의 끌어당김을 만들고 있는 내 안의 신념은 무엇일까? 금기를 만들어내는 신념과 그로 인해 파생된 결핍을 마주하며 욕망의 금지선 너머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려 한다.
평일에 하루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아이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대한민국 여성들이라면 모든 공감할 것이다. 업무와 살림과 육아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로 돌아가는 해방 타임. JTBC 예능 프로그램 ’해방 타운‘ 을 보고 나만의 결핍이 아니었구나! 했다. 붙박이장처럼 일해야 하는 나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바쁨 속에서 여유로운 시간과 자기 보상에 대한 목마름이 늘 있다. 공휴일 진료에 주 50시간 이상 일했던 처음 개원했을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근무 시간을 많이 줄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주중 하루를 쉬며 오롯한 해방 타임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크다. 내 사업장이니 그냥 눈 딱 감고 하루 휴진하면 될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여러 번 실행해 보려 했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내 안의 제한은 “네 아이를 키워야 하는 지금은 안돼.”였다. 적절한 타협점으로 한 달에 한 번 함께 또는 혼자 1박 2일 여행 하기를 2022년 버킷 리스트에 넣어 보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낀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을 나를 다독이며 동시에 주중 여유시간을 가지면서도 사업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다양한 가능성을 어쩌면 찾을 수도 있겠다! 마음 내어본다.
나도 노래를 신나게 잘 부르고 싶어.
“오늘은 반장이 노래 한 곡해봐라.”
학창 시절 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반장이었던 내게 노래 한 곡해 보라는 선생님들의 요구는 가장 큰 곤욕이었다. “ 선생님, 저 진짜 진짜 노래 못 불러요. 음치에요.” 초등학교 때는 그런대로 망설임 없이 노래했던 거 같다. 노래를 잘한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그런데 사춘기가 되어서는 가사를 외우는 가요도 없는 데다 내가 듣기에도 음정도 박자도 안 맞고 고음도 안 올라가고... 노래하는 것이 자신이 없어졌다. 노래해 보라는 말에 ’혼비백산‘ 못한다고 도망가기 바빴다. 손사래를 치다가 어쩔 수 없이 문득 생각 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클레멘타인‘ 을 아주 축 처지게 불러 분위기를 얼음으로 얼려 버린 이후 “나는 노래를 못 해.” 자기 제한이 강하게 생겨버렸다. 노래를 안 부르다 보니 더 못하게 되고, 못 부른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자리에서 급 겸손해졌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흥 나게 노래하는 사람을 보면 무척 부럽다. ’아~ 나도 노래 잘하고 싶은데...‘하는 욕망이 올라온다. 혼자서 운전할 때 음악 크게 틀고 목청껏 소리 질러보자! 했지만 굳어진 성대 핑계 대고, 음치클리닉에서 정기 레슨을 받아볼까? 생각만 하고 여전히 행동하지 못하는 나. 욕심만 있을 뿐 첫발 떼기가 어렵다. 이 지점에서 적절히 타협한다. ’노래 잘 못 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음정 박자 신경 쓰지 않고 재미있게 망가질 수 있는 여유와 배짱의 세계로 어쩌면 진입해 볼 수도 있겠다! 하고 말이다.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그루브와 흥을 창조하고 싶어.
“여보야~ 나도 저거 배우고 싶다.”
아장아장 아이들 키우는 새댁이었을 적 근처 문화센터에서 하는 댄스 스포츠 강습 프로그램을 보고 곁에 있는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러세. 혼자서는 안돼. 요 꼬맹이들 좀 키워놓고 같이 배우세.” 했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중간중간 배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여러 핑계를 대며 나 역시 감히 용기 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희망 사항과 달리 나는 몸치다. 뻣뻣 그 자체다. 음악의 리듬과 전혀 다르게 각자 움직여지는 관절과 근육들... 그래서인지 표정과 몸짓으로 리듬을 타며 팔딱팔딱 살아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그루브를 보고 있노라면 함께 즐겁고 흥겨우며 따라 하고 싶다. 그런데, 차마 따라 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내 안에 있다.
남이 볼까 부끄럽고 어색한, 쑥스럽고 조심스러운 어떤 것. 내 몸짓을 보고 사람들이 뒤돌아서 수군거릴지도 모른다는 망상 아닌 망상. 장바구니 든 유부녀들이 카바레에서 춤추다가 가정이 파탄이 났다, ’카더라‘ 라는 은밀한 쑥덕거림. “다른 사람 보기에 경거망동 가벼워 보이면 절대 안 돼.”라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몸과 마음을 가두고 있었구나!
투명 미닫이문 너머로 어렴풋이 멋진 드레스와 무도화를 신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얇은 문틈 사이를 메우는 희미한 음악 소리와 간간이 섞여 나오는 웃음소리. 문을 열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고개를 숙여 나를 지켜 보고 있는 주변 사람이 있는지 빠르게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드르륵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섰다. 경쾌한 4분의 4박자 음률이 잔뜩 움츠린 나를 기다렸다는 듯 솜이불처럼 폭 감싸 안았다. 새해 첫 주, 나는 그렇게 자기 제한의 금지선 하나를 넘어 어쩌면 즐거움과 흥을 창조하는 세계로 들어섰다.
“절대 안 돼!”란 말 대신 “어쩌면...” 이라고 말함으로써 신비와 마술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 ’177p –
글쓰기는 자기 암시의 주술적 효과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알아차린 자기 제한의 금지선. 하나씩 용기내어 넘어선다. 어쩌면, 가능성이 불러올 기적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