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앤 다운

동기의 동기화

by 낮별

대학원 입학하고 첫 중간고사를 치렀다. 방송대에서 객관식 시험만 봤기에 백 프로 서술형인 영화치료 시험대비가 몹시 부담이었다. 교수님이 대략 이러이러한 것들 위주로 문제를 낼 거라고 알려주시긴 했으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지난주 금요일 하루 종일 예상 문제를 만들고 책을 보며 나름대로 정리한 답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주말 내내 읽고, 내 목소리로 직접 녹음까지 해서 집안일하면서 이동하면서 듣고 다녔다. 코감기에 걸려 코맹맹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좀 웃겼다. 내가 정리한 답지만 보고 책은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내 정리를 믿어서가 아니라 뇌용량의 한계로 인한 선택과 집중 차원이었다. 시험지를 받아 들었는데 문제는 내가 정리했던 부분과 거의 일치했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들었으나 암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관계로 쓰다 보면 이게 맞나? 이 문제에 이걸 쓰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계속 들기도 했지만 오른팔이 떨어져라 깨알같이 답지를 채웠다. 영화 치료 시험을 보고 나니 시험이 다 끝난 것 같은 후련함이 들었다.


성격심리학 시간에 연구계획서 발표가 시작되었다. 첫 조 발표 후 긴장과 걱정이 더 커졌다. 학술 자료를 읽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은데 연구계획서라니... 첫 조의 발표가 끝나고 나니 교수님과 학우님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그다음 발표가 우리 조이다. 같은 조인 선생님을 만나 발표 초안을 만들면서 나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 분석력이나 구조화하는 능력, 그러니까 연구라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이었다. 어쩌면 대학원에서 학업 할 역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걸 느끼면서였다.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같은 조가 된 선생님이 비교적 나보다 이쪽 분야에는 능통해 보인다. 나는 염치 불고하고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정리해 준 초안대로 ppt는 내가 만들기로 했다. ppt가 여전히 어렵지만 그거라도 맡아서 해야지 싶었다. 성격심리학은 1학 차가 겁 없이 들어갈 수업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과정 선생님이 물었다. "1학 차인데 이 수업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고 말고요! ㅠㅠ


수요일 총장님의 얄롬 특강은 말랑말랑한 시간이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고, 얄롬의 실존주의 심리치료를 접해보고,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진솔한 대화가 오고 가는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가있다가 총장님을 마주쳤다. 총장님이 너무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씨, 우리 인문 상담 함께 해봐요. 앞으로 아주 기대돼요. 나중에 4층 내 방에 놀러 와서 얘기 좀 더 나눠봐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조금 힘을 냈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잠깐이나마 붙들어 매 놨다.


영화 치료에서 조별 발표 준비하느라 같은 조 선생님들과 연거푸 미팅, 줌미팅을 하면서 요즘 많이 가까워졌다. 너무 좋은 분들과 한 조가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정말 배울 것이 많은 분들이다. 내놔야 하는 아웃풋은 고된 것이지만, 과정이 즐거우니 다행이다. 수요일에 밤 12시까지 장장 세 시간의 줌미팅을 하면서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수업에서 짧게 토론할 때보다 훨씬 충만함이 느껴졌다. 자려고 누웠는데 들뜬 마음에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날 있을 시험 자료를 보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질 않고, 잠도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어제 상담심리학 시험을 마치고 동기 선생님들과 함께 파바에 가서 저당케이크 하나를 앞에 두고 찻잔으로 건배를 들었다. 우리끼리의 소박한 중간고사 뒤풀이였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우리는 엄청 오래 알아온 사람들처럼 느껴져서 함께 나눌 이야기도 무궁무진했다. 서로의 어려움을 공유하기도 하고, 각자가 가진 자원을 칭찬해주기도 하면서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고, 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욕구를 계속해서 각인시켰다. 말 그대로 '동기의 동기화'이다. 한 선생님이 물었다. "그래도, 우리 두 달 만에 처음보다는 뭔가 알게 된 것 같지 않아요? 처음엔 진짜 아무것도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내가 요즘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은 놀라고 걱정한다. 공부하느라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하지 방사통이 더 심해져서 최근에 도수치료를 다시 받기 시작했다. 치료받으러 갈 시간도 내기가 힘들어서 2주 전에 받고 병원에 가지 못했지만. 기분 나쁜 통증이 느껴져서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공부한답시고 앉아 있으니 남편은 잔소리가 많다. "아프다면서 대충 해. 시험 대충 보면 되지. 공부는 애들이 해야 하는데 엄마가 왜 저런다니?" 대충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내 기준에서는 내가 하는 수준이 대충이다. 이 정도도 안 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쓸 수 없으니 대충이라도 쓰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공부하려면 이 걸로는 택도 없다. 그래서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주말 동안에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ppt 만들기, 독서모임(다행히 책은 수업에서 과제로 내어주신 심리학 책이라 읽긴 읽었으나 기억이 가물가물), 오늘 저녁에는 내 상황으로 미뤄뒀던 영어사설 스터디, 일요일에는 또 영화치료 줌미팅이 있다. 무엇보다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개막이다. 그건 어떤 일이 있어도 봐야 하므로 미리미리 모든 걸 끝내 놔야 한다. 엊그제 플레이오프 4차전은 하이라이트로 보고 놀라고 또 놀라고 이 경기를 라이브로 못 봤다니 내가 뭘 놓친 거야 싶었다. 삼성 한화 양 팀 팬들의 뇌혈관이 심각하게 걱정스러운 경기였다. 열받아 터지든, 좋아서 광분하다 터지든 간에. 어느 팀이 이기든 상관없으나 5차전까지 치르길 바라는 입장에서는 아주 꿀잼의 경기였다.





이전 07화산 넘어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