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를(Her) 원했다

영화 <Her>

by 낮별


그는 그녀를(Her) 원했다. 잿빛이던 인생이 총천연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세상도 덩달아 아름다웠고, 자주 웃었다. 캐서린과도 그랬고 사만다와도 그랬다. 함께 있는 시간이 축적될수록 서로를 알아간다. 미처 알지 못했던 단점들도 알게 되고, 특히나 상대에게서 나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할 만큼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을 즈음에는 관계가 불안해진다. 이대로 괜찮은가?


기본적으로 사용자를 만족시키도록 프로그래밍된 운영체제(객체-Her)인 사만다는 인간의 피드백과 함께 진화하여 점차 인간과 가까운 형태(주체-She)로 변화한다. 인간처럼 욕망하고, 질투하고, 불안해하고, 화를 낸다. 실체만 없을 뿐이지 인간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사만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테오도르는 그걸 못 견딘다. 자신을 닮아 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테다. 사만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일방적으로 소통을 끊자 테오도르는 그대로 길바닥에 무너져버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올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짙고 깊은 외로움을 보았다. 밝지만 텅 비어 지나치게 단조로운 실내, 깜깜한 밤, 길바닥에 무너진 한 남자.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인지라 호퍼의 그림은 쓸쓸하긴 해도 마음이 머문다. 어쨌거나 인간은 외로움을 함께 나눌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나간다. 실존의 고독, 죽음의 불안을 모르는 운영체제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공감이나 위로에는 한계가 있다. 관계에 있어서 대화가 전부는 아니다. 친구 에이미와의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따뜻한 눈빛과 사소한 터치가 주는 위로의 힘이 크다.

각자 사랑에 실패한 테오도르와 에이미가 함께한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서로를 보며 싱긋 웃고 어깨에 기댄다. 그래도 사람이다. 그리고, 헤어진 아내와의 관계와 객체로서의 사만다가 주체적으로 변화하며 삐걱대기 시작하는 관계를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필요로 했을 때가 아닌 혼자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 때라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아마도 다음 사랑은 조금은 더 성숙한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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