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패배

이게 바로 인간미지!

by 낮별

중 1 아이는 생애 첫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이 아이의 평소 모습을 보면 장래 희망에 대한 별 생각도 없고 따라서 공부에 대한 의욕도 없어 보였다. 이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시험 대비를 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스스로 필요를 인식하여 공부하는 내재적 동기가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내재적 동기가 부재하니 외재적 동기라도 부여해야 했다. 첫 시험에서는 외재적 동기라도 부여하여 성취하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이에게 말했다. "올백 맞으면 네가 갖고 싶은 거 하나 사줄게." "진짜지? 정말이지? 나, 게이밍 노트북 갖고 싶어." 나는 아주 쿨하게 받았다. "오케이, 사줄게." 이렇게 쿨하게 받을 수 있었던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백이라는 점수는 나도, 남편도, 큰 아이도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미션 임파서블'임을 백 퍼센트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 집 DNA에는 있을 수 없는 점수였다. 본격적으로 기말고사 대비를 하며 문제집을 풀려보면서 나는 역시 올백은 무리수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다시 제안했다. "올백은 너무 인간미 없으니까 평균 99점만 받아도 엄마가 너 사달라는 거 사줄게." 실은 이것도 불가능한 점수라고 생각했다. 내심 평균 90점만 넘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잘했다고 칭찬해 줘야지 했다.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은 아이는 열심히 공부했다. 사준 문제집을 다 풀고 나니 문제를 더 찾아 달라고 요구했다. 기출비 같은 카페에 들어가 열심히 기출문제를 출력해서 대령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엉터리 외재적 동기라도 부여하길 잘했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저렇게 열심히 했는데 미션에 실패하면 그 절망감을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 절망감 때문에 공부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게 아닌지 염려도 되었다. 수학은 학원에 다니니 학원에 맡기고, 나머지 과목은 집에서 혼자 끙끙댔다. 나는 열심히 출력 공장을 돌렸다.


그리고 지난주 기말고사를 치렀다. 아이는 시험 기간 내내 "시험 너무 재밌어.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짜릿한 기분이 들어. 게다가 학교도 일찍 끝나니까 너무 좋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시험이 재미있다니 신기한 놈이군'싶었다. 객관식 점수가 바로 나왔다. 정오표를 가져왔는데 국, 영, 수, 사, 과 다섯 과목 중 국어에서 5점짜리 객관식이 하나 틀리고 나머지 과목은 다 맞았다. 순간 기분이 좋으면서도 뱉어놓은 말이 있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서술형이 남았으니 괜찮아. 서술형을 다 맞았을 리가 없잖아. 큰 애도 그렇게 말했다. "엄마, 내 경험으로 보자면 서술형 감점 안 당하기 쉽지 않아. 서술형에서 분명히 감점이 나올 거니까 걱정 마셔." 작은 아이는 무슨 자신감인지 빨리 게이밍 노트북 알아보라고 큰소리쳤다. 우리는 설레발치지 말라고 무시했다. 서술형 감점을 간절히 바라는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서술형 결과가 나왔다. 정말 다 맞아버렸다. 평균 99점을 딱 맞춘 것이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평균 1점 내려줘서 진짜 그게 신의 한 수였어." 나는 뒤늦게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게이밍 노트북? 이제야 그런 것도 있나 싶어 검색했다. 가격을 보고 내가 진짜 미쳤구나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말했다. "노트북 사봤자 그거 얼마나 쓸 일이 있을까? 친구 집에 가져가서 게임한다고 했는데 일 년에 몇 번이나 친구집 가니? 별로 쓸 일이 없잖아. 엄마가 대신 100만 원을 네 통장에 넣어줄게. 그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아이는 화를 벌컥 내면서 문을 쾅 닫고 제 방에 들어가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엉엉, 엄마는 진짜 나쁜 어른이야. 약속도 안 지키고..."


남편도 큰 아이도 이걸 보고 있더니 내가 경솔했고, 내가 나쁘다고 했다. 아니, 안 사주겠다는 게 아니라 효용성을 생각해 보자는 거였지... 하고 말 끝을 흐렸다. 결국, 마인크래프트가 가능한 노트북을 알아보고 있다. 아이는 어떤 노트북을 살지 자기한테 먼저 컨펌을 받고 구입할 것을 부탁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이 자식, 엄마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녀석 반에서만 올백이 두 명이나 나왔다고 했다. 역시, 시험이 쉬웠던 게야. 다시는 경솔한 배팅을 하지 않으리... 그래도 첫 시험에서 비록 외재적 동기 때문이긴 해도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걸로 큰 출혈의 대가가 되지 않을까 위로해 본다.



아이가 틀린 5점짜리 국어 문제가 궁금해서 확인해 봤다.


다음 중 단어의 짜임이 다른 단어는?

1. 맨손 2. 새싹 3. 날개 4. 알밤 5. 한낮


아이도 틀렸고, 나도 틀렸고, 제미나이도 틀렸고, 챗지피티도 틀렸다.

아이는 날개, 나도 날개, 제미나이는 알밤, 지피티는 날개라고 답했다.

정답은 새싹이다. 왜왜왜?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니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어, 그거 새싹 맞아. 교과서에 나와."

교과서에 나오는데 왜 틀렸니?

"이게 바로 인간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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