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안다고?

"너 상담 공부 하잖아"

by 낮별

"너한테 뭣 좀 물어보고 싶은데...."


최근에 나에게 진지하게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요청을 몇 번 받았다. 골치 아픈 일이 있는데 내 의견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한테 왜?"라고 묻자,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너 상담 공부하잖아."

나는 박장대소했다. "야, 이제 겨우 1학기 마쳤는데 내가 뭘 안다고?"


웃으면서 손사래 쳤지만 웃음을 거두고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아 그들의 말을 들었다.

어쭙잖게 상담사의 흉내를 내보며 그들의 고민에 뭔가 시원한 솔루션을 주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잘 들어주기'였다. 열심히 듣고 너의 말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피드백이 최선이었다. 베테랑 상담사에게도 시원한 솔루션은 없다는 걸 아니까. 실은 모든 답은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상담사는 내담자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끔 옆에서 슬쩍슬쩍 격려하며 도와주는 것뿐이다.

친구 O는 지역아동보호센터에서 일하는 계약직 사회복지사이다. 그녀의 센터에 오는 아동 중 한 아이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곤 한다는데 이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O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마침 그때 아동심리치료를 오래 해온 지인과 만나는 중이었다. 덕분에 제법 전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O의 얘기를 들은 지인은 "그런 경우 진짜 많아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케이스는 꿈과 현실의 혼동, 어른들의 관심 끌기를 위한 것일 경우가 가장 많고, 드물게는 정신병리적 이유로 망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미취학 아동인 경우에는 꿈과 현실의 혼동이 많고, 지능이 높고 상상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학교에 와서 선생님에게 "우리 집 이사 가요"라고 말하는 식의 거짓말이다.


O가 맡고 있는 아이는 "학교에서 센터 셔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와서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를 주워서 저한테 피워보라고 말했어요. 그때 학교 안전지킴이 할아버지가 오셔서 그 아저씨를 학교에서 내쫓아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센터 선생님들이 놀라서 학교에 확인차 전화를 했고, 학교 측에서 cc티브이로 확인한 것은 그 아이가 셔틀을 기다렸다가 셔틀을 타고 안전하게 출발하는 장면뿐이었다고 한다. 모르는 아저씨는커녕 안전지킴이 할아버지도 등장하지 않았다. 아동심리치료사 지인이 물었다. 아이의 지능이나 대인관계는 어떻냐고. O는 1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머리 너무 좋지. 애들이랑도 엄청 사이좋고." 이런 경우에는 어른들의 관심 끌기를 위한 이야기 만들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어머님에게 있는 그대로 얘기하되 절대로 혼을 내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일시적인 경우가 많지만 거짓말이 반복되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준의 거짓말이라면 아이를 심리치료센터에 데려가 볼 것을 권했다. 친구 O는 내 덕에 고민이 하나 해결되었다며 후련해했고, 나는 중간에서 전달해 주며 하나를 배웠다.


친구 Y는 국공립어린이집 원장이다. 요즘 어린이집 교사 한 사람과 심각한 트러블이 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친구 Y는 거의 40년 지기 친구인데 이 친구 성품을 잘 아니까 나는 무조건 이 친구를 믿고 편들었다. "사람 잘못 만난 케이스네. 더럽게 걸렸다. 어쩌냐? ㅠㅠ내가 달리 도울 방법은 없고 속 답답하고 힘들면 나한테 전화해서 욕이나 실컷 해. 내가 같이 욕해 줄게." 그 착하고 순한 친구가 나에게 전화로 토로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음이 몹시 참담했다. 아픈 남편을 대신하여 오랜 세월 가정을 책임지며 버티고 있는 친구여서 이 친구가 겪고 있는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력했다. 그저 들어줄 뿐이었다. 친구는 연말연시를 엉망으로 보내고 있다. 어서 빨리 해결되길 바란다.


남편은 친한 친구들 연말모임을 앞두고, 요즘 개인적인 일로 몹시 힘들어하는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 주면 좋겠는지를 내게 물었다. "그냥 들어줘. 말하기 싫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남편에게 내가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하자, 남자 동기 선생님이 "남자들은 위로의 말이나 상담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술이나 실컷 사주면 돼요"라고 말했다. 이런 대답을 하는 본인은 왜 상담사가 되기로 하고 이 상심의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여자 내담자를 만나려고?ㅋㅋㅋㅋ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에 주변 사람들이 '어디 한 번 보자'하며 나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게 토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찾는 그들의 부름이 반갑기도 하다. 내가 도움이 되면 더욱 좋겠고.


그리고, 첫 학기 성적이 나왔다. 학점이 후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막상 나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성격심리학'이라 쓰고 '연구계획서'라 읽는 그 과목까지 A+이 나온 걸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엉망이잖아요? 지적할 거 많잖아요? 빨리들 지적해 봐요." 이렇게 뾰족했던 교수님의 피드백이 나를 깊숙이 찔렀기에 내심 자포자기하고 있었는데... 연구계획서, 보고서에는 감점이 있었지만 새벽 3시까지 끙끙댔던 테이크홈 테스트는 40점 만점이었다. A+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신 듯... 교수님, 감사합니다. 저를 살리셨습니다. A+이 세 과목 모두 뜬 걸 보더니 큰 아이와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역시 엄마는 인간이 아니야" "대학원 학점이 원래 이렇게 후하대"라는 내 말은 무시해 버렸다. 하긴, 큰 아이 성적표를 보니 엄마는 인간이 아닌 걸로 결론 내리는 편이 제 마음이 편했겠다. ABC가 사이좋게 어울렁더울렁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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