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미세한 연결이 나를 살린다
지난주 학생회에서 주최한 종강파티에서 여러 학우님들을 만났다. 반짝이는 재능과 아이디어를 가진 분들이 많아서 무척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참석하지 못한 다른 학우님이 나에게 종강파티 어땠냐고 질문했는데 나의 대답은 "재밌었어요. 우리 학교에 기인들이 많더라고요. 여기에서의 기인이라 함은 기이하면서도 멋진 분들이란 뜻입니다"였다. 정말 인생 재미있게 사는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에 비하면 내 인생은 참 무료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심리치료 콘셉트의 미드 동아리 소개가 있었고, 나는 그 동아리에 합류해 보고자 새해 첫 모임에 가보겠다고 신청했다. 이런 작고 미세한 타인들과의 연결이 나를 살아남게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동아리에 참석하기 전에 그곳에서 함께 보고 토론하는 미드를 몇 편 봤다. <인 트리트먼트> 상담자와 내담자 단 두 사람의 상담세션이 드라마의 전부다. 상담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 드라마를 통해 상담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그것보다 더 기대되는 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이다.
화요일에는 총장님과 함께 했던 얄롬 특강 멤버들끼리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다. 드레스코드 빨강, 초록, 하양. 읽고 좋았던 책 한 권씩 포장해 와서 교환하기. 첼로 연주. 첫 시집을 낸 분의 시집 선물. 피자, 떡볶이, 떡, 귤(파티에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떡과 귤은 내가 사갔다.)... 푸짐하고 따뜻한 파티였다. 총장님께서 평소 취미로 그리셨던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그 그림을 보며 떠오른 이야기를 써서 나누기도 했다. 이런 과제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머리가 하얘지곤 한다. 하지만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내게 떠오르는 생각을 잡으려고 애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생각에 닿게 된다. 언제나 애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애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꽃밭에 앉아 있는 귀여운 소녀, 우비 입고 장화 신고 빗 속에서 놀고 있는 소녀, 그리고 진달래였다. 그 그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나는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잊고 살았던 시간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썼다.
"어린 시절, 그다지 아름다운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극한 사랑을 받은 기억도, 사랑을 준 기억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채송화, 봉선화, 샐비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있던 앞마당에서 뛰어놀았다. 비가 오는 날엔 집 앞 작은 개울에서 정신없이 첨벙 대고 놀았다.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뒷 산을 동네 친구들과 헤매고 다녔다. 그런 기억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펼쳐졌다. 그건, 요란하지 않은 사랑과 보살핌이 있어서였고,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몹시도 사랑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 내게 필요했다는 것을 절감했다. 한 학기 동안 상담심리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혼란과 파헤쳐졌던 상처가 다독여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첫 문장 "어린 시절, 그다지 아름다운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최근에 상담이론을 공부하면서 파고 들어갔던 자기 분석 탓이다. 정신역동은 어린 시절의 결핍과 상처에 나를 자꾸 머물게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의 핵심신념을 이루었던 인지적 오류 역시 어두운 과거로 자꾸 소환시켰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그런 나를 자책하면서 나는 상담 공부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목이 메어서 울먹거렸다. 그랬더니 선배 선생님들이 모두 웃으며 "그거 어쩔 수 없어요. 다 겪을 겁니다. 애착 이론 배울 때 최악이죠. 내 부모는 나한테 이랬구나, 나는 내 아이한테 이랬구나 자책하면서..."
총장님은 내 얘기를 들으시더니 "그러니까... 나는 상담이 왜 그렇게 인간의 과거를 파고 어두운 걸 꺼내놓으려고 애를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문상담이 필요한 것 같아요." 결국 인문상담에 대한 당신의 굳건한 믿음을 확인하셨다.
분명한 건, 그날 이 글을 쓰며 울컥했던 마음 이후 나는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보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커져있다. 조그맣게 말해본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영혼이란 게 있다면, 올 하반기 두 분의 영혼은 나 못지않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타인과의 작고 미세한 연결이 나를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