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
비가 쏟아지는 날, 버나뎃은 딸 비와 함께 차 안에서 신디 로퍼의 ‘Time after time’을 신나게 부르다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가끔 너무 힘들다는 걸 알아줘. 인생의 따분함. 하지만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것들에 감동하지.” 쉽게 감동받는다는 것은 쉽게 상처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감각이 남들보다 예민하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남들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감각의 필터를 씌우지만 버나뎃처럼 예민한 존재들은 그 필터가 얇거나 없다. 보통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작고 사소한 것에도 쉽게 감동받고, 미세한 균열과 흔들림에도 상처받고 어지러움을 느낀다.
버나뎃은 HSP(Highly Sensitive Person), 즉 매우 예민한 사람일 수도 있다. HSP는 부정적 감정 전이가 강해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예술 및 공감 능력에 있어서 아주 뛰어나다. 버나뎃은 오래전 천재 건축가로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고, 계속해서 예술을 했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그녀의 예리한 감각과 감정이 밖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그녀 안에 쌓여 그녀를 병들게 했다. ‘참된 나’로 살지 못하면 절망에 다다른다.
‘참된 나’와의 불화는 타인과의 불화, 세상과의 불화로 이어진다. 일상적인 관계가 힘겨워지고, 일상의 사소한 일들조차 처리하기 버거워진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기이하고 우스꽝스럽다.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불면증 약을 타러 간 약국 소파에 뻗어 잠들어버린 그녀의 모습처럼 말이다. 남들처럼 괜찮은 척, 정상인 척하는 커버링에조차 실패한 그녀를 발견한 남편은 결국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각각의 병은 자유에 대한 상실이며, 삶의 가능성이 제한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버나뎃이 LA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뒤로하고 남편을 따라 시애틀에 정착하여 외부와 단절되어 집에 고립된 것, 정신병원에 갇히길 거부하고 남극으로 도피한 것, 남극에서 스스로의 창작욕을 발견하여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기로 용기를 낸 것, 이 모든 것은 버나뎃의 선택이었다. 갇히고 고립될 자유, 밖으로 나아갈 자유 모두 버나뎃 내부에서 일어난 역동에 의한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실존함’의 자유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실존함’의 자유를 간직하고 있는 버나뎃에게는 약물치료나 입원치료와 같은 병리적 해결책을 통한 ‘사회적’ 적응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을 통한 ‘자기’ 적응이 필요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