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기억하는 밤
지난주 작은 아이가 B형 독감을 확진받았다. 병원에서 타미플루 주사를 맞고 나서도 해열제도 듣지 않아 열이 40도까지 오르는 힘겨운 밤을 이틀 지새웠다. 오랜만에 아이를 속옷만 입혀놓고 흥건히 젖은 물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며 열을 식혔다. 아이는 이제 키가 나보다 커져 170이 넘지만 속옷만 입고 내게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 고열에 놀라 몇 번 응급실에 달려가 본 후 나는 알았다. 열난다고 응급실에 가봤자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밖에 없었다. 해열제가 듣지 않는 상황에서 열을 가장 빠르게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미지근한 물을 흥건하게 적신 물수건으로 온몸을 훑듯이 닦아 열을 식히는 것이다. 정신없는 돛대기 같은 응급실에서 물수건으로 몸을 닦는 일을 몇 차례 해보고 나서 나는 열이 난다고 응급실로 아이를 데려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쨍한 형광등 불빛 아래 그 어수선한 가운데 아이를 발가벗겨놓는 것은 아이도 나도 그 자체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적당한 조도의 불빛 아래 화장실을 반복해 드나들며 물수건을 흥건히 적셔서 아이의 몸을 계속해서 닦았다. 닦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너도 나중에 네 아이가 열날 때 해열제로도 열이 안 내리면 겁먹지 말고 엄마처럼 이렇게 해 줘. 알겠지?"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아빠는 한 번도 안 했잖아?" 하아... 그 순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남편은 단 한 번도 이 뜨거운 밤에 동참해 본 적이 없다. 아이의 고열로 힘겨운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남편은 푹 자고 일어난 표정으로 "밤새 별일 없이 잘 잤지?" 하며 묻곤 해서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와 퀭한 우리 모자는 어이없이 웃어야 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우리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는 자에게 응당 마땅히 배려해야 하는 편안한 숙면이었기에 나는 당연스럽게 아이의 뜨거운 밤을 혼자 오롯이 감내했다. 무엇보다 밤을 새우다시피 곁을 지키며 쉴 새 없이 몸을 닦아야 하는 일을 잠 많은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 어쩐지 못 미더웠다. 나의 배려반 불신반의 결과, 아이는 이런 힘든 보살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하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밤새 열나는 아이 옆에서 지키며 몸을 닦아주고 하는 일이 엄청 고달픈 일이니까 나중에 너는 네 와이프랑 같이 해주라고. 알겠지?" "그런데, 아빠는 왜 안 해?" "아빠한테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너한테는 내가 가르쳐주는 거야." 말해놓고 씁쓸했다.
남편의 숙면력에 대해 말하자면, 작은 아이가 새벽 수유를 한창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아이의 수유를 담당한 것 역시 나였다. 나는 아이가 배고픔에 깨서 숨소리만 바뀌어도 귀신같이 일어났다. 평소 잠이 많은 나는 그런 내가 놀라웠다. 모성애라는 것이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구나를 느꼈다. 남편은 단 한 번도 아이의 기척에, 나의 기척에 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모임에서 남편이 자랑스럽게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 아이는 새벽 수유 없이 밤새 통잠 자요." 스스로 무심함과 둔함을 자폭했다.
타이레놀과 부루펜 계열 해열제를 교차 복용해도 내리지 않던 열이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주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40, 39, 38, 37. 37이란 숫자가 뜨기 시작했을 때 아이는 편안한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고 나도 안도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역시 남편은 푹 자고 일어난 얼굴로 "아이 괜찮았지?" 하고 물었다. 당신은 몰라도 된다. 아이만 기억해 주면 된다. 아이의 곁을 지켜주던 엄마의 손길이 있어서 그 숱한 뜨거운 밤을 무사히 넘겼다는 것을.
그런데 며칠 후, 큰 아이와 통화하며 작은 아이와 내가 보낸 뜨거운 밤에 대한 얘기를 해주며 "너도 정말 엄마가 여러 밤새워가며 물수건으로 닦아줬는데... 기억나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의 대답이 "아니, 기억 안 나는데... 열 나서 정신없어서 그런가?"와, 진짜 너무하네. 중학교 다닐 때까지도 일 년에 한 두어 번은 연례행사처럼 지새웠는데... 그걸 깡그리 잊어버리다니... 한편, 기억하지 않고 잊어야 부모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뜨거운 밤을 잊지 못하는 나는 아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연하는 것인지도...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줬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