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안해. 이런 모습 보여서"

아들의 취중고백

by 낮별

큰 아이가 수능을 치르고, 대학이 결정되었던 그해 어느 겨울밤이었다. 아이는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하여 다니는 일과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자유를 만끽하던 날들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가볍고 근심 없던 날들 중 하루였다. 남편은 해외출장 중이었고, 큰 아이는 친구들을 만난다며 외출했고, 나는 초1이었던 작은 아이를 재우느라 동화책을 읽어주다 까무룩 잠이 든 상태였다. 휴대폰 벨이 울려서 확인하니 한때 나의 제자이기도 했던 큰 아이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이 시간에 죄송한데요... oo가 술에 취했는데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요. 어떻게 하죠?"


수능을 치른 후에 한 두어 번 술이란 걸 마시기 시작했는데 취해서 정신을 잃을 만큼 마신 적은 없었다. 아이 친구의 전화를 받은 순간 내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나에게도 취해 비틀대는 아들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아들의 토사물을 치워야 하는 현실이, 아들에게 숙취약을 챙겨주고 술국을 끓여줘야 하는 현실이 마침내 나에게도 열렸구나' 하는 것이었다. 어디냐고 물어보니 동네 노래방이라고 했다. 작은 아이가 푹 잠든 걸 확인하고 나는 자동차 키를 챙겨 외투만 대충 걸치고 그곳으로 향했다. 둘째 동화책 읽어주며 평화롭게 잠들었다가 술 취해 뻗어있는 첫째 데리러 황급히 나가야 하는 육아의 간극에 멀미 나는 날이었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 동네 노래방에서는 취기와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이 고래고래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노래방 사장님이 나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는지 문제의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었더니 노래방 한가운데 바닥에 문자 그대로 대(大) 자로 뻗어 있는 아이가 시선을 강탈했다. 키가 189, 몸무게가 90이 넘는 거구의 아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켜보고 있던 아이의 친구 둘이 나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요."



건장한 사내자식 둘이서도 해결을 못하는데, 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정말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래방 사장님까지 합세해서 아이를 흔들고, 때리고, 소리를 치고, 별 짓을 다해도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말했다. "oo야, 지금 시간이 새벽인데, 집에 네 동생 혼자 놔두고 엄마가 나온 거야. 얼른 일어나 집에 가자." 그 말에 아이는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집에 가야지. 내 동생이 형아 기다릴 텐데."


꿈쩍도 안 하던 녀석이 동생 얘기에 움직이는 걸 보고 우리 모두가 놀랐다. 친구 두 놈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내가 뒤에서 밀고 차까지 이동했다. 뒷좌석에 아이를 밀어 넣어 놓고 친구 놈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까지 오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아이의 말을 들었다. 술에 취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미안해. 이런 모습 보여서. 엄마, 미안해. 실망시켜서. 엄마, 나는 엄마한테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고, 내 동생한테도 자랑스러운 형이 되고 싶은데... 엄마, 미안해. 아빠도 안 계신데... 엄마한테 이런 꼴 보여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이가 거의 흐느끼다시피 주절대는 "엄마, 미안해" 타령에 나는 너무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했다.


가끔 아이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내느라 엄마 생일 당일에는 못 온다며 며칠 일찍 와서 얼굴만 보여주고 가버릴 때처럼. 그런 순간에는 그날 취중 상태에서 나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취중진담이었을 아이의 본심을 기억하고자 한다. 말도 못 하게 취한 상태였기에 아이의 취중 고백은 더욱 진정성 있게 들렸다. 지난 주말에 아이가 왔다 갔다. 일 년의 마지막 날인 엄마의 생일 당일에는 못 온다며 주말 이틀 동안 엄마의 술친구가 되어줬다. 그거면 됐다. 새해를 여자친구와 맞이하고 싶은 마음, 이해해 줘야지. 그런 특별한 날에 태어난 내가 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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