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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행인 Sep 25. 2023

0918 ~ 0925

**0918 월**


공항에 가는 J를 배웅함. 나이보다 열 살은 어려보이는 그를 껴안아주었다. 그의 인생에 그럭저럭 견딜만한 시련 이상의 것은 닥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하고 그만큼 좌절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될 수 있는 한 힘껏 행복해지기를. 그것은 여기에서 알게 된 다른 이들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는 남의 불행을 바랄 수는 없는 사람이다. 패트릭 베이트먼의 마지막 독백에 관해 생각함.


저녁 식사 중 표정 관리를 못해 걱정하는 소리들을 들음. 못났다. 식사 후 예정된 스터디에 빠지려다가 복귀함. Nand 게이트가 말썽이었다. 아마도 저항 관련 문제라는 듯. 생각보다 더 낯설어서 큰일이다.


D형의 부상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듯. 쾌차를 기원!


**0919 화**


휴식. 민락천을 걸으며 M과 통화. 그의 가정 문제와 나의 문제로 상담함. 우리는 우리 시대라는 질병의 다양한 양상들로 존재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나로 살아가는 일은 몇 개의 빗나간 시도들을 남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릴케).


**0920 수**


늦은 출근길에 이른 퇴근길인 Y를 마주침. 지쳐보인다. 그의 눈에서 거울을 볼 때 익히 봐온 그늘을 본다. 더 응원해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가 응원을 밀어내는 것도 느낀다. 내 착각일까? Y는 다른 누구와도 다르듯이 나와도 다르므로.


하지만 Y는 괜찮아질 것이다. 나도 괜찮아질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더 괜찮아지면 된다.


YJ님과 얘기했다. 거의 1년만에 만나는 것이라 반가웠다. 그 기간의 마지막 하루 이틀 밖에 보지 않았음에도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다. 심지어 안면인식 장애가 있다는데 선생님(이라는 묘한 호칭으로 부른다)은 길쭉길쭉해서 알아보기 쉽다고 했다.


이후 S님과 오늘 있을 라디오 방송에 관한 짧은 미팅. 이 곳의 생활에 관한 짤막한 인터뷰인데 영어로 진행한다. 청취자 수는 대단치 않다. 비가 퍼붓는다. 카페를 오가는 짧은 시간 동안 바지가 다 젖는다. <Across the Universe>의 첫 소절이 떠오름.


말들은 끝없는 비처럼 종이컵으로 쏟아져나와, 요동치듯 미끄러지며 우주를 가로질러 사라져가네


다섯 시, 방송 진행. 나름 상쾌하게 마무리했다. 인생에 관해서 뭔가 아는듯이 떠들었는데(아무것도 모름), S님이 깊은 대화에 안정되는 기분이었다고 말해줘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음. 화면 속의 나를 보는 것은 꽤 신기한 체험이었다. 살이 많이 빠져서 볼이 패어있군. 가끔 아빠 얼굴이 보이네. 이런 정도를 느끼며.


이후 비가 잦아든 것이 보여, YJ님과 대치역까지 가서 식사. 부대 찌개를 먹었다. 대화 소재가 끊임없는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저녁 식사 이후로 귀가 때까지 계속 이야기만 하고 말았다. 졸업, 포켓몬, 고양이 (…) 그런것들. 재미있었음.


열 한시. 역으로 향하는 길이 쌀쌀하다. 여름이 어느새 끝나있다. 이 여름이 끝나기 위해 몇 번의 큰 비가 내려야만 했던걸까. 우리는 냄비 속의 개구리이고, 대지는 매년 조금씩 더 끓어오르고….


**0921 목**


소방훈련이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평소대로 왔는데, 예정보다 훈련이 일찍 끝나 다행히 바로 들어감. 토스트 가게에서 홀로 식사하고 나오는데, 있을 리 없는 얼굴이 보여 가슴이 내려앉았다. 잘 생각해보면 저런 가방을 들 리가 없다. 그런데 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바보스러움.


주말 아침처럼 한산한 캠퍼스에서 자리를 고른다. 오랜만에 5층으로 가서 자리를 골랐는데 전에 앉았던 자리다(에어팟을 연결한 적이 있었음). 나는 나라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관성에 따라 할 일이 산더미이지만 새로 산 책을 읽었다. 스티븐 내들러의 교양 스피노자.


정서는 억제되어야할 정서에 반대 되며 그보다 더 강력한 다른 정서가 아니고서는 억제될 수도 해소될 수도 없다.


뜨끔하다. 이제 정말 할 일을 해야한다. 그런데 YJ님이 오셔서 또 대화.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할 머리카락을 들고 오셨다. 머리카락이 허리춤에 닿을 때가 되면 (2년 정도) 자른다고 했다. 한 뼘 길이의 머리칼 뭉치가 봉투에 담겨 있다.


저녁 식사 후, 사람들 무리에 휩쓸려 엉겁결에 옥상에서 노을을 구경했다. 불덩어리 같은 노을. 핏빛으로 물든 구름과 하늘은 이윽고 보라빛으로, 군청빛으로 변하다가 어둠에 잠긴다. 내게는 그것이 한때 격정적이던 감정이 죽어 돌처럼 굳어가는, 안타깝고 고요한 과정에 대한 은유로 보였다. 하지만 하늘은 하늘이고, 노을은 노을일 뿐이다.


익숙한 얼굴 몇이 유쾌한 소리를 지르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이미 지나있다.


**0922 금**


중요한 것은 쉽게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 담담하게 고통을 견디는 것, 대부분의 일에 대해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점심으로 집에서 파스타를 먹고, 곧 가게 될 영화제의 표를 예매했다. 우선 이창동과 백건우가 GV에 참여할 <시> 예매에 성공한 것이 고무적, 나머지 영화들도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겨우 성공했다. 켄 로치의 신작은 취소표를 겨우 구했는데 가장 먼 구석 자리다. 다른 영화와 겹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 이와이 슌지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도 상영 예정인데, 날짜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역시 포기.


오랜만에 운동. 열 세트 하려던게 네 번째 세트에서 고꾸라짐. 부상 이후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을 느낀다. 어두워질 무렵이 되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더 읽었음. 감정이 완전히 결여된 단문들로 전쟁-전후의 참상이 무자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짧은 설명으로 이 작품을 축소시켜도 되는지 모르겠다.


 “너희는 너무 예민해.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희가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거예요.”


저녁 식사 후에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5번을 들었음. 그리고 조금 더 독서. 밤산책. 반달이 예쁘게 떴는데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다. 달리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쉽다.


이제 주말이다. 하지만 내게 주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평일이 주말 같아진 것인지, 주말이 평일 같아진 것인지 모르겠다.


**0923 토**


하루종일 개체지향 설계 과목의 과제에 매달렸다. 삼 주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막판에 가서야 하는 버릇은 평생 고치질 못하는듯. PH도 다음 주 쪽지시험 준비. 이번 팀 과제 내가 한 게 없어서 면목 없다.


SM님과 우디 앨런에 대한 대화. 특히 <맨하탄>의 인트로 씬에 대해서. D형은 반깁스를 하고 있다. 팔꿈치 관절 어딘가의 작은 뼈가 깨졌다고 한다…. 하필 오른팔이라 당분간 불편할듯. 다시 한 번 쾌차를 기원. 나도 관절을 다친 사람이니….


SJ님이 사탕을 줬다. 내게 많은 걸 주는 사람이다.


D형, PH, SM님과 신전 떡볶이를 먹었다. 이 동네 와서 처음 먹는 것. 중간맛 하나도 안 매웠는데 SM님과 PH가 매워했음.


귀가 후 과제 통과. 한 테스트를 계속 통과 못했는데, 그냥 메서드 이름을 잘못 등록한 것 뿐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누나와 무빙을 봤음. 생각보다 고어하고 유치했지만 앞부분을 못 봐서 일지도.


자기 전 찰스 부코우스키를 조금 읽었다.


죽음을 물리칠 수는 없지만
삶 속의 죽음을 물리칠 수는 있다, 가끔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0924 일**


오랜만에 차로 출근, 도로가 별로 막히지 않아서 상쾌했다. 공기는 건조하고 햇볕은 따사롭고, 비행운처럼 보이는 곧게 뻗은 구름이 하늘을 수놓았다. (하늘을 수놓았다’라는 식의 진부한 표현을 지각없이 남용해도 되는것인가..) 고속도로 1차선에서 너무 느린 차, 너무 급한 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리며 아옹다옹함. 시트콤 같아 귀여운 풍경이었다.


오후 내내 PH와 그래픽 과제에 몰두했지만 너무 어려웠다. 다음 주의 숙제가 될듯.


저녁은 김치찌개였는데, 건더기가 적어 TH가 실망한 듯 보였음. 집에 가서 부리또 맛있게 먹길 바란다. 꽈배기 사줘서 고맙소. SM님 백준 문제 끝까지 풀고 퇴근하실 수 있어서 다행.


요사이 타인과 가까워 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하고 있다. 그게 내 인격적 결함의 탓인건지, 아니면 그 자체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인건지는 모르겠다. 둘 다겠지 싶지만.


관계는 내게 영원히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지만, 뿌리부터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묘하게 충만감이 드는 저녁이지만, 아침에도 그러기는 힘들겠지. 땡이가 곁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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