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소설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라플라스가 아틀란티스 같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어떤 지명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했다는 두꺼운 소설책을 내가 열심히 읽고 있으니, 옆에 있던 남편이 '라플라스가 뭐야?'라고 묻는다. 그런데 반을 넘게 읽어도 라플라스가 무엇인지 책에 나오지 않아서, 책을 읽고 있는 나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궁금증은 소설의 3분의 2를 넘게 읽고 서야 풀렸다.
라플라스는 프랑스 수학자였다. 풀 네임은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 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그러한 원자의 시간적 변화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387쪽)
수학자 라플라스는 위와 같은 가설을 세웠고, 이 가설이 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룬다.
이 소설은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추리소설에서 수학자의 가설이나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이라니, 수학이라면 30년 가까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수학이니 물리니 생각할 것도 없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흥미롭게 따라가다 보면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이야기가 끝난다.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 우하라 마도카 : 토네이도에 의해 엄마를 잃고 스스로 라플라스의 마녀가 된 소녀.
- 아마카스 겐토 : 어머니, 누나와 함께 황화수소 중독 사고를 당하고 파괴된 뇌세포를 재생시키기 위해 젠타로 박사로부터 뇌 수술을 받고 라플라스의 악마가 된 청년.
- 우하라 젠타로 : 가이메이 대학병원 뇌신경외과 박사로 뇌신경세포 재생의 일인자이자 마도카의 아버지.
- 다케오 도오루 : 전직 형사로 마도카의 우직한 경호원.
- 기리미야 레이 : 가이메이 대학 수리학 연구소의 충실한 일꾼.
- 미즈키 치사토 : 불우한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호스티스로 일하면서 돈 많은 늙은 남자와 결혼을 꿈꾸다 꿈을 이룬 여자.
- 나카오카 유지 : 아카쿠마 온천에서 사망한 사람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를 계기로 아카쿠마 온천 사건을 추적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거의 밝혀냈으나, 상부의 지시로 끝까지 수사를 하지 못한 형사.
- 아오에 슈스케 : 다이호 대학 지구화학과 교수. 학자로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과 자신이 밝힌 전문가의 견해로 두 온천지의 관광 산업에 타격을 주었으므로 자기의 견해에 오류가 있다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사건을 파헤치다 사건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 된 인물.
- 아마카스 사이세이 : 자신의 인생에 완벽을 추구한 영화감독이자 아마카스 겐토의 아버지.
추리소설의 재미를 위해 최대한 결론을 밝히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소설의 거의 끝부분에 있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457쪽).
이 세상은 몇몇 천재들이나 당신 같은 미친 인간들로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야. 얼핏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야.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497쪽).
사건의 배경을 알지 못하는 범용한 사람들은 이토록 성실하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 온 것이다. 이것이 의미 없는 일일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의미 없는 노력이란 이 세상에 없다. 이것 또한 원자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508쪽).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 특히, 형사 나카오카와 교수 아오에는 황화수소 사건과 정말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데, 각자 사건을 파헤치다가 서로 알게 된 정보를 교류하면서 사건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결국, 형사 나카오카는 상부의 지시로 더 이상 수사를 진척시키지 못하지만, 그가 사건의 결론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동안 진실을 알기 위해 한 노력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수험 공부를 할 때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가 있다. 공부를 하면서 보낸 몇 년의 시간들이 결국 합격을 하지 못하면 '0'이 되는 거라고. 수험생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어떤 학원 강사가 했던 말인 것 같은데, 당시 나는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20대 대부분은 그냥 없어지는 것인가. 이후 2차 시험에 떨어져 다시 1차 시험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 저 말이 떠올라 더 좌절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결국 합격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사라져 간 결국 합격선을 넘지 못한 친구, 선후배들도 많았다. 결국 합격을 하지 못한 그들의 그 시절은 그냥 '0'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그때로부터 시간이 15년 이상 지났고, 나는 그동안 직장 생활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있다. 나의 길었던 수험 생활이 그때는 참 막막하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 전체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사라졌던 친구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온 적도 있고, 어떤 선배나 후배가 어디에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나는 그 친구나 선후배가 잘 살고 있는데, 힘들었던 수험 생활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간절히 노력했던 사람들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그 시절은 결코 '0'이 될 수 없다. 아오에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의미 없는 노력이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었을 때 참 따뜻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소설도 살인 사건이 나오기는 하지만 따뜻하면서도 희망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 소설을 읽지 않았던 나는 독서모임을 하면서 추리소설을 3권이나 읽었다. 그동안 읽은 추리소설들은 너무 재미있어서 책을 펼치면 다 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독서모임은 나에게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재미를 알려주었고, 균형 잡힌 독서를 하게 해 주었다. 꾸준히 책을 읽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책을 읽고도 구성원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하다.
여러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