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 기획이 현장에서 무너지는 순간들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
한때 크게 인기를 끈 웹툰 미생에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대사다.
중간지원조직에서 '심사하는 자'의 시선으로 서류를 보던 내가, 이번에는 그 서류를 품에 안고 직접 현장으로 뛰어드는 NGO 실무자가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워가며 만든 기획서는 완벽해 보였다. 수치화된 목표, 논리적인 인과관계, 효율적인 예산 배분까지. 나는 내 기획서가 현장의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줄 마법 지팡이라도 되는 양 기세등등하게 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장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 아래서 상상했던 대상자는 숫자로 정의될 수 없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삶은 기획서의 칸 안에 갇혀 있어 주지 않았다.
지원 현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나의 오만함이었다. 기획서에는 분명 '오전 10시 교육 시작'이라고 적었지만 현장에서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길이 끊기거나 당장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주민들의 사정으로 행사 자체가 무산되기 일쑤였다. 책상 위에서는 완벽했던 자립 지원 프로그램이 당장 오늘 하루를 견디는 게 목표인 누군가에게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도 했다.
한 번은 정성껏 준비한 물품 지원 행사가 대상자들 간의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기획서에는 공평한 배분이라고 적었지만 각 가정의 속사정과 그들만의 커뮤니티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배려는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기획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나는 현장 구석에서 남몰래 울었다. 기획자로서의 무능함에 자책했고 통제되지 않는 환경이 야속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그 눈물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현장을 비로소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는 것을.
기획서의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의 맥락이었다.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은 화려한 커리큘럼이 아니라 프로그램 시작 전 대상자와 나누는 따뜻한 차 한 잔, 그들의 말 못 할 사정을 들어주는 10분의 대화였다. 책상 위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던 것들이 기획서가 무너진 자리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기획서를 쓰려 고집하지 않는다. 대신 유연하게 무너질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는 법을 배웠다. 현장의 목소리에 따라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는 용기, 그것이 NGO 실무자에게 필요한 진짜 역량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획은 사무실 책상에서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생명력을 얻어 완성되는 곳은 결국 땀 냄새나고 때로는 눈물 섞인 치열한 현장이다.
오늘도 책상 위의 완벽함과 현장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동료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우리가 흘리는 그 눈물이야말로 진심이 담긴 사업을 만들어가는 가장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문제 해결의 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