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인 전문가의 Product 경험기 Episode 1
Domain (도메인: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전문영역)에서 활동하던 지식을 바탕으로 Product Maker로서 일하게 된 지 언 9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서비스를 개편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Legacy(레거시: 기존 시스템)에 치여서 한 동안 방향성만 바로잡고 있는 모양새였다. 물론 외부에서 볼 때 그렇다는 의미다.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Product 지식을 갖추기 위해 여러 가지 서적과 문서를 보면서 고군분투 중이다. 아무래도 Product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그 지식의 부족함이 생기면 이해도가 낮아지기 때문에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고 큰 Episode들이 생기는데 이것의 일부는 나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평소에 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 내용을 글로 정리한다면 내 스트레스 관리에도 도움을 줄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관점을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이 되는대로 Episode를 정리하고자 한다.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A라는 회사는 영업 조직에서는 아주 중요한 고객이고 A사의 원활한 플랫폼 입점이 간절하다. A사의 원활한 입점을 위해서는 B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너무나 클래식한 문제다. 거의 직장인에게는 문제 은행의 예제 수준이다. 보통 B를 어떻게 해결하는 가에 따라 그 사람을 '일잘러'라고 부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 이런 문제를 푸는 것에 꽤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풀어온 예제의 개수에 있다. 아마도 약 500개 이상 풀어본 적 있지 않나 생각된다.(그중에 4점 자리 문제도 꽤 많았다.. 그런 문제는 항상 관공서도 찾아가기 마련이다..) 문제를 풀 때 중요한 것은 A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가?라는 것을 확인하고 B 문제를 재정의 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이야기만 듣고 'B가 필요하다고 하던데요?!'라고 이야기를 해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보통은 B-1-1-1 정도 파고들었을 때, 아 실제로는 C를 해주거나 D를 해줌으로써 그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도메인에서의 활동이다.
문제는 이것이 Product라는 세계와 만났을 때 시작된다. B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Product 조직에서 확인해 줘야 하는 상황이면, Product 조직의 대답이 주목된다. (다만 B라는 문제가 잘 정의 되었는가는 다른 맥락이다.) 복잡도는 Product의 셈법으로 부터 시작하는데 기본적으로 이진법(0 or 1 -> Yes or No)이다. 내가 경험한 상황은 결과가 부분적으로는 Yes이 경우다. 이 경우를 문장으로 표현하면 '아, 대응은 가능한데 품질은 책임 못합니다.'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어딘가 Product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불완전하다. 그 이유는 문장 자체가 이진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총체적인 판단으로는 'No'라는 문장이 되어야만 비로소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보통 Product 조직에서 듣는 답변은 '안돼' 일 것이다.
'아 뭐 맨날 안된데..'라고 생각한 것이 지난날의 나였다. 그럼 지금은 생각이 다른가? 물론 지금도 같은 뇌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철학적인 부분이 있다.
내가 이 문제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우선 'B라는 문제가 잘 정의되었는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만 내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고 Product담당자이기 때문에 너무 깊은 접근은 간섭이 되어버린다. 'a님, 고객이 말하는 게 정말 B가 맞아요? 우리는 다른 답은 못 줍니까? 혹시 Product 이전에 대응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아요? 아니면 D를 줄게라는 말은 해봤어요?' 등등 내가 이전에 문제를 풀었던 방법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기에는 상대가 Junior든 Senior든 상관없이 월권 행위로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의사 결정 상대방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No'라고 대답하고 있지만 실제로 시도해봤던 내용과 자세한 사례들을 공유하면서 고객을 대할 상대방에게 최대한 많은 단서를 주는 것이다. 고객을 다룰 때는 단도직입적인 'No'만큼 불친절한 것은 없다. 결국 'No'라고 해도 왜 'No'인지 설명하고 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줌으로써 신뢰를 쌓는 영역이 영업이다. 그 영역까지 인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그냥 'No'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여기까지가 나의 생각이었다면 실제의 고민거리는 미팅이 끝난 이후에 온다. 한 동료가 화가 난 상태로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기를 '해서 구현 가능한 것', '해서 구현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고, 그 결론이 조금이라도 안 되는 것에 가깝다면 우리는 안된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이 친구가 평소의 나에 대한 편견을 포함한 의견까지 던진다. '지난번 회의에도 A라는 지식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던데, Product 그렇게 몰라도 되는 거니?'라는 식의 문장을 구성하여 이야기한다.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진 상태의 역사적 맥락이 있는 분노 같지만 이 친구가 도를 넘는구나 싶다. 아마도 보통 이 근처에 스트레스 포인트가 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내가 그 친구보다는 분명히 Product 적으로는 지식이 부족한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 한 참 뒤 그 조금이라도 화를 식혔는지 한 가지 코멘트를 날린다. '정보를 모두 주는 것'과 '안된다고 하는 것'중에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후자가 더 배려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야?라고 하기에는 생각이 깊어진다. 갑자기 아주 예전 드라마 한 편이 떠오른다. 한석규가 주연했던 '뿌리 깊은 나무' 였던가? 스토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글을 모르는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극 중 윤제문 배우의 대사였던 것 같다. 결국 한글 창제는 백성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그 선택과 행동의 주체를 백성에게 떠 넘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한글은 배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식의 주장이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생각한 것은 이 일이 일어난 한밤 중이다. 영업 담당자가 길게 글을 보냈는데 함축하여 이야기하자면, '그래서 고객한테 된다고 해? 안된다고 해?'였다. 허탈하다. 결국 이 친구는 B에 대한 대답을 'Yes or No'로 얻고자 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너 정말 B가 문제라고 생각하니? 어디까지 파봤니?' 등등의 생각이 확 치솟다가 이 친구가 어디까지 알아본 건지 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러려니 한다.
사실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어느 선에서 무 자르듯이 잘라서 구분하여 업무 하는 것이 전문 분야일까? 아니면 그 연결을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답일까? 그 시도는 어떤 어려움을 기반으로 하는가 등등 생각이 많아지지만 아직 연결을 이야기하기에는 Product를 너무 모른다. 다만 이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성향이 있다. 즉 과연 Product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다.
상품 혹은 가치 있는 물건이 Product의 본질이라면 Product는 완결성에 답이 있는 게 아니다. 결국 그 상품을 사용하는 고객이 느끼는 가치에 있을 것이다. 전문 영역과 전문가는 해당 분야에서 완결성 있는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다만 어떤 상품이 완결되었다고 평가하는 거나 만족을 느끼는 것은 고객이다. 고객이 없는 Product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것이 아주 이해하기 힘든 고도의 예술품이거나 쓰레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