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r Braun Jan 21. 2024

기록과 기록의 긍정

부암동 환기 미술관 (024.01.21)

 부암동은 나에게는 좀 특별하다. 제대 후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선배를 만났다. 지금은 '독특하다'라는 멋진 표현이 생각나지만 당시에는 정말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차 있는 대학생은 얼마나 큰 특권을 가진 자인가. 그 특권을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각 잡힌 남자후배들에게 베푸는 참 이상한 선배였다. 거기다가 취향은 남달라서 가는 곳마다 이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하나같이 멋진 곳이었다. 아무튼 선배의 생각은 알 길이 전혀 없었지만 선배가 베푼 호의 덕분에 그때부터 좋은 장소와 음식이 주는 임팩트가 내 인생에 천천히 흘러 들어온 것 같다.

 은인 같은 선배는 공강 시간에 가끔 연락을 했다. 선배는 하얀색 중고 아반떼를 몰았다. 만약 그 차가 삐까뻔쩍했다면 나는 그 선배가 돈이 넘칠 듯 많고 그 사실을 가진 것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부류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마치 고물 자전거 타듯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를 몰고 다니면서 오로지 우리가 지금부터 도착할 곳에 무엇이 맛있고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데 가장 큰 열정을 보였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종류의 여유였다.



 처음 그 차를 얻어 타고 청와대 앞길을 통해 부암동에 갔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일단 청와대 앞길을 차를 몰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시에는 청와대 초입은 경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창문을 여유롭게 내리고 '부암동가요'하는 선배가 왠지 한 참 더 어른 같아 보였다. 그리고 청와대 앞길을 지나 무궁화동산을 끼고 우회전을 기다릴 때는 '부암동'이라는 발음이 주는 오묘함을 고민했었다. 이런 이름의 동네도 있었나?

 어찌 되었든 내 첫 '부암동'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어른의 영역이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대학생으로서 가질 수 없는 일종의 사치적 여유 같은 곳이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제법 유명해졌지만 정말 그때는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고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곳이었다.

  한번 깨어 버린 대학생의 나는 서촌, 북촌 등으로 확장시키며 나름의 경험을 넓혀갔다. 그 동네를 아는 내가 꽤 여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유를 부려 자신감을 나타내야 할 때는 꼭 그 범위 안에서 약속을 잡았다. 오래된 마을에 모던함이 공존하는 그 동네에 있으면 왠지 나도 과거를 고수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가는 예술가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만 알던 동네들이 하나둘 씩 모두가 아는 곳이 되어갈 시간이 흐르게 되자 나의 사치적 여유는 평범한 피곤에 밀려버린 상태가 되었다.



 한남대교를 지나 남산 톨게이트만 통과하면 내비게이션을 무시한다. 내가 아는 길이 분명 5분은 빠를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이리저리 운전하다 보니 익숙한 풍경에 다다랐다. 이번 한 주가 스트레스로 가득 차버렸기 때문에 감흥을 내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생각 없이 청와대 앞길을 지나고 있었다.

 신혼집이 부암동에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 길을 무수히 많이 지나다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갑자기 태어나지 1년도 안된 아들이 청와대 앞길, 차 안에서 대소변을 함께 본 경험이 떠올랐다. '진짜 엄청 당황했었지.'라고 혼잣말을 꺼내다 보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났던 것 같은 내 안이 고요해진다.


 HWANKI. 영문 대문자로 쓰고 보면 왠지 브랜드 같다. 미술관 입구에 있는 생애를 읽다 보니 시대에 비해 다양한 경험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선구자라는 이름이 붙었다면 뭔가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고 역시나 그 생애도 평범치 않았다. 불확실한 현대를 살아가는 나도 내 삶의 마지막은 왠지 한국일 것이라는 묘한 고정관념 있다. 그런데 오늘의 선구자는 그 사실조차 통용되지 않는 삶을 사셨다. 천천히 생애와 작품을 구경하다 보니 선구자에 대한 존경심의 감정이 든다.

 이전에 장욱진 화백의 작품전을 보고 와서 고백했듯이 나의 미술적 지식은 전무하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관람하고 작가의 문장을 읽어보면서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냈을지 유추해 본다. 그래서 나에게는 작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생각을 반영하는 작가의 문장이 정말 소중하다.

 점점화(點點畵). 점들로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했는데 나에겐 그 점이라는 것이 하나의 세포 같이 보였다. 세포가 정확히 어떤 구성을 가자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세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에 중간의 점이 찍힌 형태는 내 머릿속 세포라는 이미지와 맞는다. 마치 세포처럼 그려진 점들이 아주 많이 이어져서 하나의 추상적인 형태를 가져가는 것인데 그 작품이 생각보다 커서 웅장함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파란색으로 칠해진 Air and Sound라는 작품이 이유 없이 좋았다. 약 3:2 지점에 있는 비어있는 선이 좋았다고 해야 될까. 그냥 직관적으로 뭔가 좋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감상을 하다가 2층을 지나갈 때 김향안 님의 이야기가 한쪽에 정리되어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아내로 작품을 집대성하는데 기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니 기여한 정도가 아니다. 매 사진마다 같이 계시고 어려운 형편에도 미국에서 화백의 작품 기록을 남기기 위해 부단히 애쓴 모양이다.

 갑자기 개인 미술관을 어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누가 만들었을까? 아마 만들 수 있었다면 왠지 김향안 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김향안'의 검색어의 결과 값이 대단했다. 어쩌면 나만 몰랐던 사실인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했다. 맙소사. 소설가 이상의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이 미술관까지 김향안 님의 기록과 노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기록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하나의 작품도 중요하지만 기록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가지는 가치는 없을까? 가치를 알아주고 꾸준히 관리했던 기록이 하나의 또 다른 가치가 되어 버린 현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망상을 하게 된다. 옆에서 내가 작업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기록을 자처하고 있다가 내가 가장 지칠 때 그 기록을 꺼내보여 주면서 익숙하게 위로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어쩌면 오랜 시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고 이것이 대작을 만들게 한 적절한 시기의 긍정이 아니었을까?



 선배의 차를 타고 봤던 사치적 여유의 부암동. 퇴근길로의 부암동. 육아의 추억이 담긴 부암동. 그리고 오늘, 평범하게 늙지 않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무심히 지나칠 뻔한 부암동. 이 모두 다 같은 장소이다. 적절한 기억들이 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면 삶을 되돌아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 같다. 각각의 추억을 마치 세포처럼 성실하게 기록해 두었다가 지치는 날에 꺼내보면 그다음을 이어주는 긍정이 되지 않을까?


안국에서 부암동까지

 

작가의 이전글 시간 돌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