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모은 잡지 탐방 (24.03.17)
이번주는 도쿄에 있었다. 일 때문에 곧 잘 도쿄로 출장을 다녀온다. 출장이 정말 쓸모 있는 일인가에 대한 고찰은 자주 하지만 쓸데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쓸모없음과 쓸데없음을 구분하고 싶어 져서 사전을 뒤졌다. 이번엔 실패한 모양이다. 사전적으로는 두 단어가 한 가지처럼 쓰이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이럴 땐 감정적 호소가 답이다.
'쓸데없다'라는 말과 '쓸모없다'라는 말을 똑같이 사용할까? 일단 개인적인 경험으로 '쓸데없는 것'은 조금 더 가치판단에 가깝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고 그래?'라고 이야기할 때 진짜 가치가 없는 일인지 아닌지 알기가 어렵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고 그래? (속뜻: 해줘서 고마운데 그렇게는 말 못 해)'라는 부분도 종종 있는 것을 보면 조금 더 설득적이지 않을까? 이와는 다르게 '쓸모없다'는 꽤 현상에 가깝다. '왜 쓸모없는 일을 하고 그래?라고 하면 정말 쓸모없는 거다. 그것에 속뜻은 없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억지스럽게라도 논리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걸까?
'쓸데없는' 취미가 하나 있다. 매번 출장에 갈 때마다 읽지도 못할 잡지를 사 오는 일이다. Brutus, Popeye 등 감성 있어 보이는 잡지가 눈에 띄면 참지 못하고 사가지고 온다. 잡지의 주제가 '가구', '인테리어', '도시', '술' 등 의식주에 깊게 관련되어 있어 보이면 거의 100%의 확률에 가까워진다. 싸게는 800엔 비싸게는 2,000엔까지 주고 잡지를 산다.
가격은 뭐 그렇다고 치자. 나름 30대 후반의 벌이를 고려하면 엄청난 사치는 아니다. 오히려 술 한잔 가격과 비슷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그렇게 까지 '쓸데없는'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쓸데없다'는 범주에서는 오히려 술 한잔이 더 백해무익하지 않을까?
문제는 감정적 소모다. 감정적 소모는 주로 구매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맥주 10병을 맛별로 바구니에 가득 넣어 매대로 가는 외국인은 그렇게까지 부끄럽지 않다. 매대 점원도 관광객이겠지 싶을 거다.
그런데 '봉투 드릴까요?'라는 말도 이해 못 하는 외국인이 굳이 텍스트로 이루어진 잡지를 사가는 그 순간이 꽤 감정적 소모가 심하다. 일반적으로 문자를 읽는 콘텐츠를 사려는 전제는 문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물론 오랜 시간 출장과 여행을 다닌 탓에 '봉투 드릴까요' 정도의 말에는 답할 수 있다. 다만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듣거나 생각보다 빨리 말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라는 걱정에 그 순간만큼은 감정적 소모를 각오해야 한다. 물론 매대 점원은 관심이 없겠지.
이렇게 까지 '쓸데없이' 잡지를 사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위에 내가 원하는 세상이 이미지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항상 그려온 세계가 있다. 조금 더 민감하고 구체적이며 좋아 보이는 공간. 혹은 더 좋아 보이는 음식. 혹은 더 좋아 보이는 옷. 결국 더 좋아 보이는 의식주에 대한 방향을 항상 동경해 온 것 같다.
현실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킨포크 잡지에 감명받아 모처럼 정갈한 저녁 시간을 준비했다고 해도 그 삶을 1년 유지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고고한 화이트 오크색으로 도배된 주방도 킨포크 놀이 3개월 차에는 온갖 기름이 튄다. 한식은 필수이기 때문에 고추기름은 당연히 묻겠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나은 의식주가 있다면 시도해 보는 사람이 있고 아마도 그게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그 마음에서 더 좋아 보이는 것을 항상 동경한다는 마음에서 읽지도 못하는 잡지를 사서 모으는 게 아닐까?
어떤 종류의 일을 할까?라는 고민은 꽤 오래전부터 해왔다. 내가 동경하는 가치 있는 의식주 세상에는 항상 전문가들이 빛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전문성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무슨 말일까?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표방하는 잡지를 하나만 펼쳐보자. 유명 셰프, 디자이너, 건축가, 기술자들의 철학과 가치로 가득 차있는 면면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나는 어떤 기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일을 하다 보니 세월과 만난다. 결국 세월을 돌이키기는 어려운 것 같다. 세월을 돌이킬 수 있다고 해도 어떤 능력과 선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왔다고 했을 때 나는 셰프, 디자이너, 건축가가 되어있을까? 그리고 탁월했을까? 오히려 아마도 현재 내가 하는 일보다 탁월하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남보다 뛰어나지 못한 재능에 대해 온갖 저주의 말을 담고 살았을 수도 있다.
세월은 체념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다. 체념이라는 것이 슬프게 들리지만 어쩌면 세월을 열심히 살아온 보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내가 오해하고 있던 나의 욕구에 대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체념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프로젝트(목표)가 주어지면 여러 기술을 사용해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해왔다. 그것이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인지, 자료를 만드는 것인지, 혹은 설득되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 며칠을 설득하는 것인지 관계없다. 결국 어떤 일이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의 나의 직업이다. 이러다 보니 나는 무엇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해왔다.
그런데 쓸데없는 취미를 계속하다 보니 결국은 체념하게 되었고 그 결과 '판단의 기준을 비틀어 보기'로 했다. 그것은 '전문가'의 잣대를 나에게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어떤 가치에 변화를 이끌어 낼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서비스 프로듀서라는 말을 통해 나를 정의하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든 사람을 상대로 하나의 서비스가 도달할 때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퍽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일을 해와서 전문성이 없다는 말을 평가 기준을 바꾸면서 하나의 역할로 정의하는 방법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세상의 가치'를 이룰 것인가가 된다. 당연히 그 가치는 '더 높은 의식주'가 된다. 쓸데없는 취미의 쓸모가 발현되는 순간이다.